[마츠오이] together
2018. 11. 28. 01:00아침 댓바람부터 소란이다. 방문을 닫았음에도 들어오는 소음에 마츠카와는 이불 속으로 몸을 구겼다. 주말에는 사진 찍으러 다니는 게 일상이었는데,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장마 때문에 그것조차 하지 못해 실망하고 있는 처지였다. 오늘 하루는 집에만 있어야지. 야심 찬 계획을 세운 것도 잠시, 방으로 가까워지는 발걸음에 모른 체하며 자는 척을 해봤지만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기어코 이불을 걷어낸다.
“잇세이 나가자니까? 주말에 생산적인 일 좀 하자고!”
“아 싫어…. 지금도 충분히 생산적인 일 하고 있거든. 그리고 배구야 혼자 다녀오면 되잖아. 나는 뭣도 모르는데 거기를 왜 가.”
“어차피 오늘 비 온다는 핑계로 누워만 있을 거면서. 사진 찍는 거 아니면 밖에도 안 나가지? 이럴 때 같이 좀 다녀오자.”
주전도 아니고, 애초에 자기 학교 시합도 아니면서 형은 꼭 봐야 하는 경기가 있다며 일주일 전부터 호들갑이었다. 배구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귀찮음이 앞섰지만, 형의 말은 왠지 거절할 수가 없어서 결국에는 주말 아침 일찍 외출을 감행해야 했다. 비 오는 날 나가는 거 진짜 싫은데. 왜 배구는 실내 스포츠인가에 대해, 마츠카와는 알지도 못하는 배구 창시자를 속으로나마 욕했다.
마츠카와에게 장마는 순전히 사진 찍는 데에 대한 장애물에 불과했다. 소나기처럼 빗줄기가 얇지도 않은 데다가 금세 그치지도 않아서 장마 때는 모든 것에 제약이 생기기 때문이다. 비와 함께 연출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해도 한두 장이어야지, 그것도 장마에는 찍어봤자 빗물밖에 보이질 않았다. 카메라가 젖을 수도 있고. 게다가 지금도. 운동화 속으로 들어오는 축축함에 불평만 쏟아졌다. 얼마나 대단한 시합인지 보자.
겨우 들어온 경기장 안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목에 걸고 있는 카메라가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해봤자 현 내 중학생 시합인데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사람과 부딪히는 것도 짜증 나는데 비에 젖은 우산들마저 제 바지를 스치고 지나간다. 자진해서 온 경기장이 아니라서 그런가, 온갖 것에 짜증이 일었다. 빨리 집에 들어가 시원한 물로 샤워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침에 꾸물댄 자신과 한 실랑이 때문인지, 객석에는 자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위에서 서서 보자. 가까이서 보지 못해 형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크게 미안하지는 않았다. 그러게 왜 끌고 와서는. 서서 볼 거면 집 가면 안 돼? 철없는 소리가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가까운 곳에서 보지 못하게 된 한 줌의 미안한 마음에 겨우 삼켰다.
시작한다! 멀리서 보이지도 않는데 흥분을 감추지 못한 형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진다. 떨어질 듯 불안하게 난간을 잡고 서 있는 형과는 달리,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해 머리 뒤로 깍지만 낀 채 무료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 형 그런데 어디 응원하는 거야?”
“글쎄. 사실 두 팀 다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뭐? 그게 뭐야.”
“두 팀 때문에 우리 학교가 떨어졌으니까! 우리 귀여운 후배들이 얼마나 울었는데.”
“그러면 왜 온 거야. 저주하려고?”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런 걸 다 떠나서 진짜 멋있는 선수가 있어. 너도 보면 반할걸.”
중학교 3학년이 멋있어봤자 얼마나 멋있다고. 게다가 배구의 규칙도 모르는 자신이 봐서 무얼 알 수 있을까. 형이 말한 선수라는 단어에도 살짝 오글거렸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아침부터 귀찮게 하기는 했어도, 형이 좋아하는 배구를 매도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말해주지 않아도, 형의 표정으로 형이 말하는 학생이 누군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공을 올리는 것으로 보아 형과 같은 포지션인 모양이다. 그래서 형이 더 좋아하나? 눈만 살짝 돌려 바라본 형은 그렇게 좋은지 제 팀을 응원하는 듯 기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실력이 뛰어난 만큼 인기도 많은지 여학생들의 함성은 끊이질 않는다. 저도 모르게 그 학생에게 집중했다. 배구를 알지는 못하지만, 녀석이 배구를 정말로 좋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광판에 비친 공을 만지는 녀석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한 번만 더 자세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잠깐의 쉬는 시간 동안 브라운관에서 녀석의 공격 장면을 보여줬다. 코트에서 관중석까지는 거리가 꽤 됐기 때문에, 표정을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랑은 다른 앳된 얼굴이 곧게 뻗은 하얀 손가락에서 떠나는 둥근 볼을 기쁜 표정으로 바라본다. 공을 던지는 것에 대한 순수한 기쁨과 자신의 공격이 말끔히 성공했을 때는 만족감, 혹은 고양감 등. 앳된 얼굴에 참으로 다양한 표정이 보인다. 설령 공격이 막히더라도 다음을 외치며 자리를 재정비해나간다.
어느새 깍지를 풀고 형과 마찬가지로 난간에 가까이 몸을 붙였다.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그를 보고 싶었다. 언뜻 스쳐 지나가는 오이카와—관중석에서 하도 외쳐 대서 선수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의 다양한 표정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아, 담고 싶다.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렌즈 안에 담긴 오이카와의 공격 동작. 카메라를 든 자신을 바라보던 형은 웃으며 셋업이라 알려줬다. 셋업. 입에 한 번 담고는 오이카와를 초점에 맞췄다. 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짚어낸다. 제가 빠진 그 찰나를 담고 싶었다. 신중히 오이카와의 차례를 기다렸다. 또 한 번 오이카와의 셋업 순간이 왔을 때, 렌즈에 잡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찰칵.
집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경기는 끝나고야 말았다. 아쉽게도 오이카와 팀의 패배. 역시 우시와카를 이기기는 힘들지~. 우시와카가 누군지는 몰라도 엄청 대단한 선수인 듯, 멋진 싸움이었다며 박수를 보내는 틈으로 간간이 들렸다. 형은 낮게 오이카와도 대단하다며 항변했다. 누가 보면 오이카와 팀인 줄 알겠네. 물론 그렇게 생각한 제 시선에도 오이카와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더 오이카와를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형 미안. 일찍 나왔으면 가까이서 볼 수 있었을 텐데.”
경기장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후회했다. 괜찮아. 네가 즐거웠으면 됐어. 형은 호탕하게 웃으며 경기장 밖으로 향했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계속 경기장에 발이 묶였다. 배구를 좀 더 알았다면 나도 같이 느낄 수 있었을까. 처음으로 사진이 아닌 다른 것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근래 제 감정을 반영하듯, 마츠카와는 오랜만에 오이카와를 처음 만난 날을 꿈꿨다. 만났다기보다는 접했다는 표현이 맞으려나. 아무튼,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기에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생했다. 책상 위에 놓인 지갑을 들어 한 편에 넣어 놨던 오이카와의 사진을 꺼냈다. 아오바죠사이의 명물로 통하는 오이카와의 사진쯤이야 금방 구할 수 있었지만, 이때의 사진만큼은 달랐다.
인물을 담고 싶다고 생각한 건 단연코 처음이었다. 동적인 사람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최대의 난제였으며 매력을 느낄 수 없는 미지의 것이었다. 사람은 가만히 있더라도 미세한 변화가 있기 마련이라, 때마다 자아내는 분위기가 다르다. 따라서 원하는 찰나를 담기 위해선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순간을 잡아낼 만큼 자신은 인내심이 크지도 않았으며, 사람을 찍는 행위에 매력을 느끼지도 못했었다.
그러던 자신이 오이카와가 셋업 동작을 취하는 순간에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었었다. 오이카와를 보며 처음으로 사람을 사진 안에 담고 싶다고 느꼈다. 지금과는 다른 순수한 미소는 그가 배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지금 역시 좋아하는 건 같지만 그때만큼 웃음이 순수하지는 않다.— 비록 지기는 했어도 나름 후련해 보이는 얼굴에, 경기장을 나오면서는 단순한 녀석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아는 사람 중 최고로 알 수 없는 사람한테 무슨 생각을 했나 싶지만.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면, 제일 먼저 도착해 있는 사람은 역시 오이카와. 그리고 이와이즈미. 초신뢰관계라는 이름으로 둘은 언제나 붙어 있었다. 오늘도 높게 떠 공을 날리는 오이카와를 향해 사각 틀을 만들어본다. 두 손의 엄지와 검지를 직각으로 만들어, 서로 엇갈려 합치고는 오이카와를 안에 가둔다. 그러면 또 들어와 있는 이와이즈미.
쯧. 마츠카와는 혀를 차고 손을 떼어 내며 사각 틀을 없앴다.
“맛층! 오늘은 빨리 왔네? 빨리 옷 갈아입고 와~.”
이와이즈미는 당연한 듯 오이카와에게 수건을 건네고, 오이카와는 당연하게 그걸 받아 닦는다. 그들이라 특별하지 않았던 행동들이 자꾸 제 신경에 거슬렸다. 이와쨩~ 맛층이 오이카와 씨 말 무시해! 대꾸도 하지 않고 뒤도니 오이카와의 우는 소리가 들린다. 안겨 오는 오이카와를 밀어내는 이와이즈미까지는 볼 필요도 없었다.
사각 틀을 만드는 행위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을 때부터 갖게 된 오랜 버릇이었다. 그리고 버릇처럼, 처음 본 날을 잊지 못해서일까. 오이카와만 보면 꼭 한 번씩 해보기도 했다. 손가락 너머의 작은 세계로 바라볼 때면, 오이카와의 옆에는 언제나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이 언젠가부터 거슬리기 시작했다.
물론 소꿉친구이면서 옆집에 사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건 딱히 이상한 모습이 아니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던 모습도, 익숙해지고부터는 오히려 따로 있는 모습이 더 어색할 정도였다. 그때와 달라진 거라고는 딱 하나, 오이카와를 향한 제 마음이다.
쾅! 화풀이인 것을 알지만 애꿎은 캐비닛을 세게 닫으며 심호흡을 했다. 눈치로는 따라갈 수 없는 녀석이라 아무렇지 않은 척 포장을 한다. 걱정은 또 많아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답해줄 말이 없었다. 네가 좋아. 간단하지만 간단하게 내뱉을 수는 없는 말이다.
가뜩이나 짜증 나는 날, 하늘도 도와주질 않는다. 하늘에서 퍼붓는 비만 허망하게 쳐다봤다. 훈련이 끝나고 캐비닛 정리가 늦어져 혼자인데 심지어는 우산도 없었다. 쏟아지는 기색으로 보아 맞고 갈 만한 비도 아니었다. 꼼짝없이 처마 아래 신세가 되어버렸다. 훈련도 일찍 끝났겠다, 오랜만에 사진 좀 찍어 보려고 했건만. 신발이 더러워지는 건 신경 쓰지도 않고 애꿎은 바닥만 두어 번 차고 있었다.
“엣, 맛층 집 안 갔어? 오이카와 씨가 특별히 일찍 끝내줬는데!”
혼나야겠구만~. 마지막 정리를 이제 막 끝냈는지 오이카와가 능청 부리며 제가 있는 처마 아래로 들어온다. 조금이라도 어색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메고 있던 가방을 뒤지는 오이카와를 향해 말을 건넸다.
“정리는 다 끝났어? 이와이즈미는?”
“그럼~! 오이카와 씨는 유능한 주장이라고? 이와쨩은 오늘 상담. 그래서 오이카와 씨 혼자인데! 특별히 우산 씌워줄게.”
“…나 우산 있는데.”
“있었으면 맛층 벌써 집 갔겠지~. 비 엄청나게 싫어하잖아.”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확신하는 어투다. 소꿉친구만큼은 아니어도 함께한 시간이 오래되니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을 수도 있고, 빠른 눈치도 한몫했을 수 있다. 그럼 제 마음이나 알아봤으면 좋겠건만. 인기는 많으면서 의외로 이런 데에는 둔한 녀석임을 알고 있기에 일찌감치 포기했다.
팡! 옆에서 오이카와가 우산을 펼치는 소리가 마치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셔터음 같아서, 또 순간 그의 모습을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날 카메라를 꺼내면 바로 보내줘야겠지만.
작은 우산 아래서 옆에 빈자리를 만들며 오이카와가 저를 쳐다본다. 낯선 감정으로 좀체 진정하질 못해서, 웬만해선 오이카와와 단둘이 있는 자리는 피했었는데. 빗소리에 심장 소리가 지워지길 바라며 오이카와가 펼친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190cm에 육박한, 거기에 운동부 남학생 2명이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가는 것은 조금 우스워 보이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오이카와에게서 감추기 위해 애썼다. 아무리 이런 데에 둔하다고 해도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 어느 때나 조심해야 했다.
사람 파악도 잘하고 분위기를 완화하는 데에는 뛰어난 녀석이라, 둘이 하는 하굣길이 지루할 리는 없었다. 걱정한 것만큼 긴장감 있지도 않았고. 저 혼자의 감정 하나 달라졌다 한들, 사이가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내심 씁쓸하게 느껴졌다. 옆에서 재잘대는 오이카와의 말에만 대충 대꾸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걷고 있었다.
“아 맛층. 미안한데 잠깐 스포츠 가게 들리면 안 될까?”
서포터가 망가져서…. 오이카와 특유의 자기 불리할 때 나오는 비 맞은 강아지가 연상되는 처량한 눈빛이다. 거절을 막기 위한 속셈임을 잘 알면서도 이에 휘둘리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이전이었다면 그 모습을 보고 흔들리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
“급한 건 아닌데 이와쨩이 보면 분명 벌써 망가졌냐고 잔소리할 게 뻔해서, 이와쨩 없을 때 가야,”
“그래.”
응?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온 대답을 믿지 못하겠는지 눈만 끔뻑였다. 비 오는 날이면 집으로 직행하는 버릇도 알고 있으니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작은 우산으로는 채 가려지지 않는 어깨 위로 내리는 빗방울에 곧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그놈의 이와쨩을 더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어차피 비도 조금씩 그치는 것 같은데. 스포츠샵에서 시간 때우다 가든가.”
혹여 이상하게 보일까 싶어 애써 뒷말을 덧붙였다. 아~ 그럴까? 오이카와는 놀랐던 기색도 금세 지우고 수긍한다. 이와이즈미라면 굳이 이런 변명도 할 필요도 없겠지. 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의미 없는 비교에 자조했다.
오이카와의 옆에 항상 있는 이와이즈미가 거슬린다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와이즈미는 좋은 녀석이라서,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맛층 안 와? 그러다 비 맞아! 자신이 비 맞는 건 상관없는지, 오이카와는 제가 있는 쪽으로 우산을 기울인다. 잠시 제 처지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였다.
“오, 맛층 말처럼 비 멈췄어!”
스포츠샵에서 시간을 보내니 그칠 기색이 보이질 않던 빗줄기도 어느새 약해졌다. 비가 그친 것에 기뻐해야 할지, 한 우산 아래에서 같이 갈 기회를 잃어버린 데에 아쉬움을 표해야 할지. 고민하던 것도 잠시, 갠 하늘을 올려다보는 오이카와를 향해 이끌리듯 두 손가락을 펼쳐 사각 틀을 만들었다. 사각 틀 안에 들어와 있는 오이카와. 문득 우산 아래에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 안에 서서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잖아, 맛층. 그거 버릇이야?”
“응?”
“이거.”
저를 따라 두 손가락을 들어 사각 틀을 만든 오이카와가 제게로 사각 틀을 옮겼다. 오, 맛층 보인다. 여기 봐봐! 한쪽 눈을 감으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오이카와는 그 안에 든 제가 신기한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인다. 남몰래 하던 버릇을 들켰음에도 당황스럽다기보다 그저 웃고 있는 오이카와만을 지켜봤다. 아, 사진 찍고 싶다. 지금 이 순간 카메라를 갖고 있지 않은 사실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이걸로 그동안 오이카와 씨 본 거야? 맛층 음흉하네~.”
“아니거든. …내 취미가 사진인 건 알지.”
“응. 1학년 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창 놀렸었지. 뜬금없이 그건 왜?”
“이거 사진 찍는 거랑 비슷해 보이지 않아? 손가락으로 앵글을 맞추고, 눈을 감으면 셔터를 누르는 거야.”
“오…, 좀 그럴듯한걸.”
“오이카와. 가로세로 고작 이 한 뼘의 길이로 만들어진 이 조막만 한 넓이가 내가 담는 세계라면, 그 안에 가둔 너는 그 세계에서 얼마나 큰 존재일 것 같아?”
접지 않아 사각 틀 그대로인 손가락의 작은 세상 너머로 한쪽 눈을 감고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조막만 한 넓이가 제가 담고 싶은 세계이자 제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제가 담는 이 작은 세계에 자신이 얼마나 큰 존재일지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제 말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몰라도, 오이카와는 사각 틀을 만든 손가락도 그대로 두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저를 쳐다본다. 비도 그쳤으니 난 이만 갈게. 혼란스러운지 말을 잇지 않은 오이카와에게 손만 흔들어주고는 뒤를 돌았다.
“맛층! 그게 무슨 의미인데!?”
소리치는 오이카와도 놔두고 설렁설렁 멀어졌다. 언뜻 비가 오는 것도 꽤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 * *
사각 틀을 만드는 행위가 버릇이라고는 해도, 오이카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정도로 자주 하지는 않았다. 오이카와를 만났을 때 사각 틀을 만들었던 것은 단지 호기심에 불과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버릇되었을 뿐이다.
오이카와를 처음 알게 된 날처럼, 오이카와를 제대로 처음 만난 날 역시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이라 잊기가 더 힘들겠지만.
고등학교는 집 근처라는 이유로 고민할 것도 없이 아오바죠사이로 진학했다. 오이카와는 어디로 진학했을까. 배구를 좀 한다는 녀석들이 시라토리자와가 배구로 유명하다고 말한 것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오이카와도 실력이 꽤 됐으니 시라토리자와로 갔으려나. 그날 봤던 경기 이후 오이카와의 소식은 졸업 전에 ‘베스트 세터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마지막이었다.—굳이 찾지 않아도 배구에 대한 이야기에는 금세 나오는 유명인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아 어쩌면 아오바죠사이로 갈 수도 있겠다. 걔네 중학교가 많이 진학하는 곳이라고 들었거든.’
어렴풋이 들었던 반 친구의 말 덕분에 입학식 날까지 온 신경이 오이카와의 고등학교로 쏠렸다. 아오바죠사이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하나의 연관 고리가 나오자, 처음 만난 피사체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지루했던 입학식의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 체육관으로 발을 돌렸다. 세이죠도 시라토리자와 못지않게 배구부로 유명하다 했으니, 오이카와가 이 학교로 진학했다면 체육관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이유 없는 이끌림이었다.
…안타깝게도 문이 닫혔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애초에 배구부하고는 연관이 먼 사람이니,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문이 열려 있다면 또 한 번 오이카와가 하는 셋업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쉬운 마음에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어, 이와쨩 우리랑 같은 사람 여기 또 있나 봐!”
이상한 별명을 부르는 높은 소리에 저절로 고개를 돌렸다. 한 번밖에 보지 못했어도—그조차 브라운관으로 본 게 다였지만—, 제가 찍은 사진을 닳도록 봤기 때문에, 그가 오이카와라는 사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안녕.”
“안녕! 우리는 체육관이 궁금해서 왔는데 닫혀 있는 거 있지? 강호 교라면서 입학식 때는 쉬나 봐~. 너도 배구부 들어오려고 보러 온 거야? 어느 중학교야? 배구는 했었어? 포지션은?”
만나자마자 제 친구인 양 친근하게 말을 거는 녀석에, 따라가지 못하고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경기를 봤던 날에도 생각했지만, 배구에 대해서는 굉장히 열정적인 듯했다. 옆에 있던 이와쨩이라는 녀석은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구기며 서 있었다. 인사 이후 이어지는 끊임없는 질문에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더니, 이와쨩이라는 녀석이 곧이어 오이카와를 구박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적당히 하라니까!”
“쳇, 그러는 이와쨩이나 표정 풀지? 체육관 문 닫혀 있는 것 본 뒤부터 그러고 있으면서!”
아 그냥 쟤도 배구 바보구나. 무서운 건 아니었지만, 잠시나마 긴장하고 있던 제가 바보 같았다. 오이카와 같은 녀석과 함께 하는 것을 보면 동류일 텐데. 앞으로는 간과하지 말아야지. 배구부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것도 아니면서, 점점 두 사람과 함께 하는 부 활동을 상상하고 있었다.
“음…, 마츠…, 마츠카와? 오, 오이카와 씨랑 같은 한자 쓰네! 마츠카와 잇세이? 맞나? 나는 오이카와 토오루. 잘 부탁해! 옆에는 인상 나쁜 사람은 이와이즈미 하지메!”
쿠소카와가 진짜! 두 사람은 또 앞에서 정신없어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자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둘만의 세상에 빠졌다.
녀석의 이름은 이전에 봤던 경기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나왔던 ‘나이스 오이카와’라는 소리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처음 보는 녀석들과 말이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제 눈에는 완벽한 셋업이었다 해도 진 시합을 꺼낼 필요는 없지.
“야 가자. 늦겠다.”
“벌써 그렇게 됐어? 그럼 마츠카와, 다음에는 체육관에서 보자~!”
정신없는 인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멀어졌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녀석들은 그때도 함께였다.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사각 틀을 만들어 그들을 가뒀다. 배구 바보들과 함께 배구를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아 너도 배구부 들어오려고?’
중학교 때처럼 귀가부를 선택할지 부 활동을 선택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세이죠에 사진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진으로는 부 활동을 하고 싶지 않아서, 만약에 부 활동을 해야 한다면 배구부를 고민하기는 했었다. 형이 하는 것을 몇 번 본 적도 있었고, 오이카와도 있었고.
사각 틀 안에 있는 그들을 보다가 문득, 지갑 안에 넣어둔 오이카와의 사진이 생각났다. 사람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찰나를 위해 기다려서 찍은 것도 처음이었다. 사진을 찍었을 때는 조금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냥 두기에는 아쉬운 마음에 인화까지 해서 지갑에 넣어두었다. 들키면 곤란해질 걸 알면서도, 오이카와가 학교에 있다는 것을 알고도 빼놓지는 않았다. 그날의 오이카와를 다시 한번 담고 싶었다.
결국 고민하지도 않고 배구부에 입부 신청서를 내기로 결정했다. 신청서에 배구부를 적는 것을 본 형은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잇세이 네가 배구를 한다고? 제 방처럼 누워서는 사람 무안할 정도로 웃는 형을 무시하고는 신청서의 마지막까지 채우고 연필을 내려놓았다. 아. 갑자기 드는 궁금증에 아직도 방에 가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 형 쪽으로 돌아보았다.
“그런데 형. 우리 작년에 배구 보러 간 날 기억나?”
“응. 당연하지. 그때 너 표정 진짜 웃겼는데.”
“아, 좀. 아무튼 나 배구는 하나도 모르는데 왜 굳이 데려가려고 한 거야?”
“아~ 그냥 뭔가 네가 사진 찍을 때 표정이 그 선수랑 닮았다고 생각했거든. 그 왜 끝까지 배구공만 쫓아 보는 거나 공격이 먹혔을 때 웃는 모습 같은 거. 왠지 그거 볼 때마다 네가 사진 찍을 때 집중하거나 만족스런 사진 나오면 짓는 표정이 생각나서 한 번 보여주고 싶었거든. 똑같아 보여서.”
“…….”
“솔직히 그때, 배구 보러 왔지 사진을 찍으러 왔냐고 한소리 하려고 했는데, 그날 잇세이 표정 보고는 그 말도 쏙 들어갔잖아. 말은 안 했는데, 나 그때 처음으로 잇세이가 사진 찍는 모습이 멋져 보였어.”
물론 생긴 건 그 선수가 훨씬 잘생겼지만! 마지막 말만 없으면 참 좋았을 텐데. 저게 형이라는 사람이 할 말인가 싶지만, 바로 오늘 오이카와를 만나고 온 자신도 수긍하는 부분이었기에 반박하지는 못했다.
“아 맞다 형.”
“왜 또.”
“우리 학교에 오이카와 있더라.”
“와 진짜?!”
배구부에 들어간다고 말할 때도 누워서 웃기만 하더니, 확실히 형에게 오이카와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침대 위에 바른 자세로 앉은 형은 뭔가 이해했다는 눈치로 저를 쳐다봤다.
“그래서 잇세이가 배구부 들어가는 거구나~.”
“뭐야. 그거 하나로 이해하는 거야?”
“아까 말했잖아. 네 표정 진짜 웃겼다고. 처음에는 지루해하더니 집중하는 게 얼마나 기특했는데. 아무튼 잘해 봐. 사진 찍는 것만큼 배구도 재밌을지 모르잖아?”
글쎄. 어깨만 으쓱이고는 신청서를 가방에 넣었다. 얼마나 흥미를 끌지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와 함께 하는 배구가 기대되는 건 사실이었다.
신청서를 내기 위해 도착한 체육관에는 강호 교라는 이름답게 입부 날부터 사람이 많았다. 특히 오이카와의 주변에는 사람이 몰려 있었다. 베스트 세터 상은 배구를 좀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제법 구미가 당길 법한 주제일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어제의 그 정신없던 기색을 생각해보면 오이카와의 성격 탓일 수도 있지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옆에서 함께였다.
오이카와는 경기를 봤을 때 예상했던 대로 형과 같은 포지션인 세터였다. 세터라는 자신의 포지션에 자긍심이 보이기도 했다.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고 납득했다.—물론 그와 함께 연습하면서, 그 실력이 재능만으로 나온 게 아니라 노력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1학년이라 본격적인 연습을 할 수 없음에도,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배구공을 손에서 놓질 못했다. 역시 배구 바보들은 다르네. 우스갯소리를 하는 친구들 틈에서 빠져나와, 조심히 사각 틀을 만들어 오이카와를 향해 들어 보였다.
처음 찍었던 인물 사진이 뇌리에 박혀선지, 오이카와만 보면 버릇이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특히 전에 찍었던 것과 같은 표정을 다시 한번 담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었다. 단순히 잡아내기 어려운 게 아니었다. 사각 틀 안에 담긴 오이카와의 표정에서, 그때와는 다른 위화감을 느꼈다.
사진을 찍을 수만 있다면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을 텐데. 그 의문은 얼마 안 가, 우연히 그때와 닮은 표정이 담긴 사진을 얻으면서 금세 풀 수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남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를 가진 오이카와는 교내 잡지에 종종 출현했다. 게다가 오이카와는 제가 나왔으니 꼭 읽어보라며 배구부원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딱히 갖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뻔뻔하기 짝이 없다 생각하면서도, 내심 실렸다는 사진이 궁금해서 못 이긴 척 받아왔던 잡지였다.
잡지에는 신문부답게 건질 만한 사진이 꽤 있었다. 그중에서도 역시 놓칠 수 없는 건 배구하는 오이카와. 사람은 다 같은 모양인지, 신문부도 제가 빠졌던 그 모습을 찍어 잡지에 실어 놓았다. 오이카와의 사진을 들여 보다가 어딘가 다름을 느껴, 지갑 안에 넣어둔 오이카와의 사진을 꺼내 옆에 두고 비교해 봤다. 그때 본 표정과 지금의 표정은 미묘하게 달랐다. 동시에 오후에 있었던 부원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오이카와의 셋업을 질리도록 보더라도, 그때의 표정은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언제나 진중하게 배구를 하는 오이카와라도 연습과 시합은 다르다는 걸까. 내심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나저나 오이카와 녀석, 결국 시라토리자와 안 가고 여기 왔네?”
“그러게 말이야. 독하긴 진짜 독해.”
“이번에는 우시지마를 이길 수 있을까?”
시라토리자와. 우시지마라는 이름을 듣고 나서야 제가 봤던 시합의 상대였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들의 과거를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제야 오이카와의 표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단번에 이해했다.
아무리 배구를 대하는 오이카와의 마음이 그때와 같다 하더라도, 패배—자세히는 몰라도 꽤 연속적인—를 경험한 오이카와가 지금까지 순수함을 간직하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단순한 녀석도 아니고 오이카와처럼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제가 모르는 경험을 한 오이카와는 순수함만을 간직할 수 없어서, 그때와는 다른 표정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날의 표정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오이카와와 배구를 하면서 새로운 표정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때와는 달라져도 배구를 하는 오이카와를 담아내고 싶었다.
오이카와와 함께 하면서 제법 많은 사진을 찍었다. 함께 배구를 하니 오이카와와 배구하는 모습은 같이 찍을 수 없었지만, 그 표정은 사진 없이도 그려낼 수 있다. 제가 빠졌던 그때의 표정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오이카와는 배구를 좋아했다.
다만 그때의 순수함은 다신 볼 수 없었다. 그때의 순수함을 기대하기에는 지금의 오이카와는 성격이 많이…. 지금의 오이카와에게 순수함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마냥 순수하게 기뻐하고 해맑은 표정을 짓는다면,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로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오이카와를 담고 싶은 마음은 여전, 아니 더 커가기만 했다. 이와이즈미와 함께 하는 오이카와가 아닌, 배구하는 오이카와도 아닌, 오롯한 오이카와 존재만을.
* * *
호기심에 오이카와를 사각 틀 안에 담아내다 점점 그에게 빠져든 것처럼, 호기심은 때로 독이 되기 마련이다. 누굴 좋아하는 감정이 독이라는 건 아니지만, 마냥 좋기만 한 감정도 아니니까.
‘내가 담는 세계라면, 그 안에 가둔 너는 얼마나 큰 존재일 것 같아?’
그 말에 호기심을 가진 오이카와는 계속해서 마츠카와의 주위를 맴돌았다. 의외로 궁금한 것을 못 참는 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오이카와가 옆에 있으면 힘든 건 마츠카와 쪽이라 이득이기도 했지만, 일부러 맴도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있기는 힘들었다.
“어이, 마츠카와. 오이카와가 너한테 무슨 잘못 했냐?”
“응? 아니. 왜?”
“아니면 네가 뭔 잘못 했어? 쟤 요새 왜 저렇게 뭐 마려운 개 마냥 저래.”
경기에 집중 못 하는 주장이 못마땅한지 이와이즈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이카와는 평소처럼 연습에 집중하려 했고 진지하게 임했지만, 초신뢰관계의 눈까지는 속이지 못했을 뿐이다.
내심 이와이즈미도 모르는, 오이카와의 수상쩍은 행동의 이유를 저만 안다는 것에 대해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마츠카와는 순간 제가 이렇게 쪼잔했나 싶지만, 좋아하는 감정에서 사람은 유치해질 수도 있는 거라며 합리화했다.
“걱정하지 마. 오이카와잖아. 금방 풀리겠지.”
뭐…, 네가 그렇다면야. 별다른 건 물어보지도 않고 이와이즈미는 어깨를 두드리고 떠난다. 이와이즈미가 좋은 녀석이라는 생각은 여전하지만, 오이카와에 한해서는 역시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와이즈미도 모르는 승부를 저 혼자 하고 있는 거지만.
진전도 없이 질질 끄는 것은 질색이라 어차피 내뱉은 말, 쇠뿔도 단김에 빼자는 생각에 최대한 빨리 오이카와와 결판을 지으려고 했다. 다행히도 그 생각은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였는지, 배구부 연습이 끝나자마자 대뜸 마츠카와의 이름을 불러 세웠다. 남아서 이야기하자는 의미인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는 팀원들도 그냥 보내고 캐비닛에 기대 있자, 마츠카와의 머리 옆으로 한쪽 팔을 딛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마주했다. 근데 이 구도 위험하지 않나. 진지한 오이카와와는 어울리지 않은 불순한 생각을 감추기 위해 팔을 교차해서 끼며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맛층. 평소와는 다른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오이카와를 향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식의 순수한 눈빛을 보내기에는 오이카와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일찌감치 포기했다.
“전에 했던 말 솔직히 이해는 다 못 하겠는데.”
알 리가 없다. 애초에 사각 틀도, 그 의미에 대해서도 이제 안 오이카와가 제 말을 전부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마츠카와에게 사진은 의견을 표하는 매개체였고, 오이카와는 그와 연결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한 말은 아니었으니, 오이카와가 아무리 이해한다 해도 그 무게를 다 짚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냥 이 정도로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아무튼 잘해 봐.’
왜 갑자기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형의 잘해 보라는 말이 연애는 아니었을 텐데. 그래도 형이 바라던 것처럼 여태 배구도 열심히 했으니, 다른 길로 새도 되지 않을까?
“맛층한테 있어서 오이카와 씨는 어떤 존재야?”
“…처음 찍은 피사체?”
“하여튼 누가 사진 취미 아니랄까 봐.”
“어쩌겠어. 첫 만남이 사진이었고, 빠지게 된 것도 사진 때문인걸.”
첫 만남? 오이카와가 되묻고는 눈을 흘기며 쳐다보았지만, 물어도 말해줄 생각은 없었기에 머리만 긁적였다. 오이카와 모르게 옷 주머니 안에 있는 지갑만 만지작거렸다. 앞으로 그 안에 사진이 들었다는 것은 평생 비밀이 될 것이다.
“뭐, 됐고. 맛층이 말한 작은 세계를 생각해봤는데.”
오이카와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캐비닛에서 손을 떼 사각 틀을 만들어 마츠카와를 가뒀다. 큰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리는 오이카와에도 아무 말 않고 서 있었다.
‘이 조막만 한 넓이가 내가 담는 세계라면, 그 안에 가둔 너는 그 세계에서 얼마나 큰 존재일 것 같아?’
아무래도 큰 존재라는 말에 의문을 품은 모양이다. 보이는 대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인기 많은 이케맨은 이런 데에는 둔하다더니 역시나. 갸우뚱하는 모습은 꽤 귀여웠으나, 간만에 온 좋은 기회를 흘리고 싶지 않았다. 성격이 급한 편은 아니었는데. 지체하고 싶지 않아 입을 떼려던 순간,
“이 작은 세계에 오이카와 씨와 함께 하면 더 좋지 않아?”
들려온 것은 언젠가 원했던 대답이자, 오이카와가 건넨 간접 고백이었다.
낯간지럽게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 자연스럽게 사이는 발전했다. 물론 오이카와와 사귄다고 해서 달라진 건 많지 않았다. 전보다 달라진 거라고 한다면 오이카와의 옆에 이와이즈미보다 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증가했다는 것. 그리고,
“맛층 요새는 이거 안 한다?”
더는 오이카와를 향해 사각 틀을 만들지 않는 것.
오이카와는 그날처럼 사각 틀을 만들며 마츠카와를 가둔다. 마츠카와는 손 너머로 저를 보는 오이카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함께 만들기를 원하는 듯 오이카와는 꿋꿋하게 손을 들고 있었지만,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에이 뭐야~ 재미없게. 반응이 없자 툴툴대며 거두는 오이카와의 손을 그대로 잡고 끌어당겨 제품 안으로 가뒀다.
“이제는 널 몰래 담을 필요가 없으니까.”
사진을 찍는 사람은 피사체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진리인 만큼, 사각 틀 안의 작은 세계에서 함께 하자는 말은 어긋난 표현이지만 그럼에도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와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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