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니오이] 끝과 시작
2018. 10. 14. 16:41벚꽃이 흩날리는 3월의 어느 날, 끝이 다가왔다.
졸업식. 은퇴식이랑은 또 다른, 확실한 이별이다. 은퇴식 때는 학교 내에서라도 마주할 수 있다는 안도감―물론 그렇다고 해도 우는 사람은 있었다. 킨다이치라던가,―이라도 있었는데. 팀에서는 함께하지 못해도, 복도를 지나다 보면 마주칠 수 있었던 선배들을 보는 것도 이제 끝나는 때가 다가왔다.
학생 대표의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조용하던 교정은 선후배 간의 못다 한 인사를 나누는 소리로 가득해져 갔다. 배구부 이외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쿠니미에게는 따로 찾아가면서까지 인사할 선배가 없었기에 곧장 배구부로 향했다. 자신과는 달리 선배들은 배구부 말고도 교류가 있었겠지만, 인사를 끝낸 선배들이 도착할 곳이 결국 날마다 함께했던 체육관임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선배들의 배구에 대한 열정은 어디에 있는 옛 친구 못지않게 크다는 것도, 선배들의 모든 것이 담긴 곳이 배구부라는 것도 배구부원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
예상대로 약속한 것처럼 인사를 끝낸 선배들은 속속히 체육관으로 도착했다. 시끄러워지면서 1, 2학년들의 침울하던 분위기는 조금 띄워졌지만 아쉬운 기색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후배들의 성장을 보고 싶다며 은퇴하지 않은 것처럼 들락이던 선배들은 물론, 은퇴식 이후로는 오지 않을 거라더니 정말 오지 않던 선배들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도착했다.
제일 늦게 도착한 사람은 역시 오이카와 선배다. 주장이었던 것을 떠나, 인기도 많은 선배였기에 사람들은 이럴 때마다 그를 붙잡고는 놓아주질 않았다. 싫은 소릴 하더라도 항상 함께하던 이와이즈미 선배도 오늘같이 번잡스러운 날은 오이카와 선배를 두고 오기 일쑤였다. 게다가 오늘은 교류가 없던 사람들에게는 오이카와 선배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테니, 더욱 가만둘 리 없었다. 역시나 체육관에 들어온 오이카와 선배의 양손에는 꽃다발과 편지들이 가득했다.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인지, 졸업식이 가까워질수록 오이카와 선배가 불려 나가는 횟수는 급증했다. 복도를 지나다 보면 마주칠 수 있던 선배들의 모습에는 고백을 받는 오이카와 선배의 모습도 속해 있었다. 지금은 배구에 전념하고 싶어. 한창 고정적이었던 거절의 답을 이제는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고백하는 듯싶지만,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선배는 대학조차 배구에 관련된 학교에 가는, 여전히 배구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정말이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최대한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는 선에서 거절하는 오이카와 선배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고백받는 중에도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슬쩍 눈인사를 건네는 오이카와 선배를 보며, 자신도 마지막으로 고백해볼 걸 그랬나 싶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물론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3학년들의 정식 은퇴 이후 매일같이 드나들던 오이카와 선배와 우연히 단둘이 남아있었을 때, 이젠 더는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쉽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제 마음을 표현할 기회라고 생각하여 입을 떼려던 순간이 있었다.
‘쿠니미쨩이 오이카와 씨 후배라서 정말 좋았어. 마지막에 타오르는 쿠니미쨩만의 배구는 특히 잊지 못할 거야. 지금처럼 새로 들어오는 1학년들에게도 좋은 팀원이 되어줘.’
3년을 함께 해온 체육관의 천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제게로 돌리며 늘 하던 것처럼 저를 응원하는 오이카와 선배에, 끝내 입을 다물었다. 연애 대상으로는 보지 않는, 그저 아끼는 후배를 향해 진심 어린 조언을 전하는 선배에게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말을 내뱉을 용기 따위는 제게 없었다. 자신을 향한 신뢰감이 조금만 적었다면, 지금보다 조금 먼 선후배 관계라면, 전할 수 있었을까. 뭔가 답을 듣고 싶다고 강력하게 어필하는 오이카와 선배 덕분에 의미 없는 가정을 생각하던 것을 멈춰야 했다. 표정 관리를 잘하는 사람은 표정만으로도 표현을 할 수 있나 보다는 생각도 했다.
‘뭐, 선배를 성가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엑?! 그거 칭찬 맞아?’
‘…그럼요.’
앞에 있던 침묵의 의미는 뭐냐고, 자기는 좋은 말을 해줬는데 반칙이라며 억울해하던 오이카와 선배는 제 목을 팔로 감싸 안고는 머리를 마구 헝클며 풀어주지 않았고, 결국 마지못해 내뱉은 존경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겨우 놓아주었다.
‘좋은 사람.’
그것은 그때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이었다.
❀
3학년 선배들은 오이카와 선배가 도착해서야 참고 있던 마지막 회포를 풀었다. 은퇴했으면서도 거의 매일 체육관으로 출석 도장을 찍던 주전 선배들을 제외한 다른 선배들은 서로가 오랜만이었던지, 그들이 나누는 인사도 길기도 했다. 복도를 오가다 만나는 것과는 다른 기분이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은퇴식 때마저도 일장 연설을 해 이와이즈미 선배에게 한소리 듣던 오이카와 선배도 오늘만큼은 얌전했다. 인사 나누기 바쁜 다른 선배들 옆에서도 오이카와 선배는 체육관만 둘러보고 있었다. 다른 선배들도 굳이 방해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끝내 전국엔 가지 못했지만 3년의 세월이 담긴 청춘. 그를 돌아보는 마음이 어떨까. 잠깐 생각해봤지만 아직은 알고 싶지 않았다.
은퇴식과는 또 다른 이별에, 새로운 앞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죄송하게도 펑펑 우는 부원도 간간이 있었다. 좋은 날 울지 말라고 다독여주는 선배들을 보면서도 목이 메어 인사를 건네지 못하기도 했다. 끈끈하게 맺어진 인연은 놓기 어려운 것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시려오는 눈가를 비비려 할 때, 고개를 돌린 오이카와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라면 우는 거냐고 놀렸을 오이카와 선배도 커진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 살짝 웃으며 못 본 체해주었다. 인연의 끝을 이렇게까지 아쉬워했던 적이 있었을까. 다시는 보지 못하는 인연이 아님에도, 아쉬움이 가득했다.
체육관에 단둘이 남았던 그 날, 마지못해 말했다고는 하지만 오이카와 선배를 존경한다는 말 자체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건 저뿐만이 아니라, 오이카와 선배와 함께 배구를 했던 사람이라면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오이카와 선배의 배구는 그만큼 매력적이니까. 물론성가시다는 말도 거짓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어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존경심이 분명했는데. 동경하던 선배를 향한 감정이 커지기 시작한 때는 언제부터일까.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중학교 때부터 이어진 인연이기는 했지만 1년도 채 채우지 못한 시간임에도, 저들을 기억하고 있던 고마운 선배에 불과했다. 제 배구를 이해하고 인정해준 선배와 같은 팀에 속하게 됐으니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던 날이 시작이었을까. 선배와 함께 배구를 하면서 선배의 열정에 매료되어 좋아하던 배구를 더 좋아하게 되어, 선배에게 더 감화됐을 수도 있다. 선배의 존재는 제 안으로 찬찬히 스며들었지만, 나중에 깨달았을 땐 어느덧 포기하지도 못할 만큼 커져 있었다.
감정을 깨달은 계기는 특별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코트 위에서 날아오른 선배를 봤을 때, 깔끔하게 서비스 에이스를 성공하고 우리 팀을 향해 짓는 미소를 마주했을 때. 그때 제가 오이카와 선배에게 빠져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아채자마자 커지는 감정에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오이카와 선배는 빠질 만한 사람이었기에, 제 감정을 부인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이 감정이 팀에 폐가 되지 않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헤어지기 싫어도, 이별의 시간은 결국 다가온다. 이후에 있을 각자의 일정이 있었기에 대충 인사를 마친 사람들은 하나둘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은퇴했으면서도 주장, 부주장이었던 오이카와 선배와 이와이즈미 선배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사람들을 배웅했다. 안 가? 은퇴식 때도 그러더니, 킨다이치는 오늘도 처음부터 끝까지 울적해 했다. 하지만 그게 또 킨다이치다워서 별말 하지 않고 들고 있던 휴지를 건넸다. 조금 이따 가려고. 너 먼저 가. 개학식 때 보자. 개학식이라는 말이 또 울렸는지, 코를 또 한 번 훌쩍이고는 체육관을 나간다.
대부분이 빠져 나가고 조용해진 체육관 안에는 이제 자신과 선배 두 명만이 남아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그때까지도 체육관 곳곳을 훑고 있었다. 발을 떼기가 쉽지 않은 듯 보였다. 청승 떨지 말라고 구박할 것만 같던 이와이즈미 선배도 재촉하지 않고 오이카와 선배의 옆을 지켰다. 그 마음을 잘 알뿐 아니라 이와이즈미 선배도 오이카와 선배 못지않게 아쉬움이 가득했을 것이다.
“어라 쿠니미쨩, 아직도 안 갔어?”
“…그냥요.”
“그냥이라니! 하여튼 시시하다니까~. 그럼 인사도 다 했겠다, 우리도 이제 갈게. 쿠니미쨩, 잘 있어.”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던 제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는지, 오이카와 선배가 물어왔다. 선배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아까의 의리를 갚는 셈치고 모른 체했다. 기회 되면 보자. 어떤 날처럼 오이카와 선배가 제 머리를 헝클였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환한 미소가 마음에 걸려 저도 모르게 오이카와 선배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이대로 흘러 보내면 계속 후회할 것만 같았다. 이래서 분위기가 문제라니까.
“선배. 죄송한데 잠깐 남아주시면 안 될까요?”
갑작스레 잡았는데도 오이카와 선배는 놀라지 않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 선배는 이야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저를 쳐다보았지만,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이와이즈미 선배 쪽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 선배는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은 제 마음을 알아챘는지 이와이즈미 선배에게 손 인사를 건넸다. 아. 이와이즈미 선배는 짧게 내뱉고는 제겐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체육관을 나갔다. 옆집 사는 소꿉친구 사이인 만큼 기념일이 되면 저녁을 함께 먹는다고 들었는데. 그런데도 시간을 내준 오이카와 선배와 이와이즈미 선배는 역시 선배였다.
이와이즈미 선배가 나갔음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제 행세가 답답하지도 않은지, 오이카와 선배는 말없이 기다렸다.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지도 못하면서 차분한 모습에 도리어 심술이 나 툭 내뱉었다.
“좋아해요.”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오이카와 선배는 입을 크게 벌리기만 할 뿐 답이 없었다. 근래 들어 제일 당황한 표정이다. 하긴 고백한 자신도 당황스러운데 고백받은 오이카와 선배도 그럴 만했다.
단언컨대 고백할 생각도 없었지만, 한다 해도 고백을 이렇게 무드 없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드 없는 건 어디의 옛 친구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만 싶었다.
❀ ❀
쿠니미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오이카와는 모르진 않았다고 답할 수 있었다. 눈치가 빠른 편이기도 했고, 그 쿠니미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으니 오히려 모를 수가 없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쿠니미를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백을 받아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배구를 놓기 전까진 배구 하나에만 신경 쓰고 싶었다. 오는 고백에 그렇게 대답하면 다들 이해하고 넘어가니 핑계로 써먹기도 했지만, 거짓은 아니라서 항상 같은 말로 거절하곤 했다. 그것은 아끼는 후배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쿠니미가 자신의 감정을 아는지도 몰랐다. 만일 알고 있다면 오이카와가 생각하는 쿠니미는 감정을 다스릴 줄 알고 팀에 피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후배였기에 티 내지 않을 것 같았고, 쿠니미가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면 그냥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었다. 배구 때문이라는 이기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감정을 알고 있지도 않은데 괜히 헤집어서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더해서 솔직히 말하면 쿠니미가 고백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쿠니미가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었으니, 이대로 물 흐르듯 지나갈 줄 알았다. 어느 정도 감정은 알고 있었기에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이대로 넘어갈 줄 알았던 쿠니미가 고백을 해온 것에는 충분히 놀랐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좋아하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고는 해도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의 쿠니미의 감정을 알아챈 전과 후를 비교해 봐도, 쿠니미가 제게 대하는 태도는 항상 똑같았다. 알아챈 때보다도 훨씬 전부터 저를 좋아해서 태도의 차이를 모를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입부한 처음이나 지금이나 제게 대하는 쿠니미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선배 턱 빠지시겠는데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실속 없는 생각만 잔뜩 했다. 크흠. 목을 가다듬는 척 입을 닫았다. 평소의 쿠니미라면 예의 신랄한 표정으로 쳐다봤을 텐데. 아무래도 고백한 본인도 놀란 모양인지 더는 말이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특유의 분위기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고백한 듯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고백한 당사자가 당황하면 어떡하라는 건지. 동년배인 킨다이치보다는 항상 어른스러워 보였지만, 역시 후배는 후배였다.
“그나저나 쿠니미쨩, 이대로 넘어갈 거로 생각했는데.”
“알고 있었어요?”
“그럼! 안 그러는 애가 그렇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데 모를 리가 있겠어? 오늘까지도 아무런 이야기가 없어서 그냥 지나갈 줄 알았지.”
“진짜 성격 나쁘네요.”
표정 변화가 드문 편이기는 해도 쿠니미는 본인의 생각 표현은 착실히 하는 사람이었다. 제가 앞에 있는데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가리지도 않는다. 졸업하면 다시 못 볼 광경이라 생각했던 것 중 하나기도 해서 주책없게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래서일까. 변덕에 가까운 결정이 마음속을 계속 헤집었다.
“눈치채고 계셨다면 그에 대한 답도 있겠네요.”
“저기 쿠니미쨩, 방금 오이카와 씨가 쿠니미쨩이 그냥 넘어갈 줄 알았다고 한 말 못 들었어?”
“대답은 해주실 수 있으시잖아요.”
“아니, 원래 이렇게 저돌적이야?!”
“아시다시피 마지막에 불타오르는 성격이라.”
말이나 못 하면…. 눈을 흘기며 쿠니미를 쳐다봤다. 당당하게 대꾸하긴 했지만 그만큼 뻔뻔하지는 못한지, 쿠니미는 애써 눈을 피했다.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것이 긴장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 날 보는 새로운 모습은 꽤 신선했다.
“그런데 대답이 중요해? 고백만 해도 되는 거 아니었어?”
“그거야 그렇지만…, 선배의 대답을 들어야 마음을 쉽게 접을 수 있을 테니까요.”
차일 것을 예상하는 쿠니미에 말을 잇지 못했다.―물론 그럴 생각이었지만.― 봐온 세월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해도, 차일 걸 알면서 고백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남들이 들으면 재수 없다 할지도 모르지만, 고백해본 적은 없어도 고백을 거절했을 때의 사람들 반응은 수없이 봤었다. 원망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해하고 격려해준 사람도 있었으며, 굴하지 않고 끝까지 쫓아다니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거절당할 생각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거절당할 걸 예상했다고 해서 쿠니미의 감정이 절대 얕지 않고 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충동적이었다고는 하나, 진심으로 고백해온 이 귀여운 후배를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인지라 자꾸 길어져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지만, 시계도 보지 않는 걸 봐서는―그만큼 긴장해서일 수도 있다.― 쿠니미는 이후 일정이 없는 듯했다. 어차피 저도 기다리고 있는 건 가족들과 이와이즈미밖에 없었으니, 지금은 오롯이 앞에 있는 쿠니미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저 독재적인 제왕님의 배구와 스타일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에 짓눌려 제대로 자신의 배구를 펼치지 못하는 안쓰러운 후배일 뿐이었다. 함께 팀으로 뛰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전보다 더 배구에 전념하게 됐을 때는 뿌듯하기도 했다. 무기력해도 배구는 좋아해서 빡빡한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기도 했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성격이라 신랄한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친구도 생각할 줄 아는 기특한 후배였다. 처음에는 거기까지가 다였다. 쿠니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애초에 연애 상대로 누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솔직히 지금도 온전하게 마음이 쿠니미에게 가있다고는 말은 못하겠지만, 숨기고만 있던 감정을 내뱉은 후배를, 마지막이라는 분위기를 힘입어 겨우 고백한 쿠니미를 거절할 생각이 좀체 들지 않았다.
곰곰이 쿠니미에 대한 제 마음을 생각하고 있을 때, 아까까지만 해도 피하기만 하던 쿠니미의 눈이 제 셔츠의 두 번째 단추로 향한 것을 발견했다. 고백은 거절당하더라도 함께 해온 후배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단추 정도는 요구해도 좋으련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쿠니미의 성격을 알기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결국 웃으며 자신의 단추를 떼어냈다. 쿠니미의 눈이 커졌다. 말하지 않아도 고백에 대한 답이라는 사실은 전달된 모양이다. 자신도 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는 예상할 수 있었다.
벚꽃이 흩날리던 3월의 어느 날, 새로운 시작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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