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오이] 갑과 을의 연애

2018. 7. 16. 23:41


오늘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했다. 몇 번을 퇴짜 맞는 거지. 물론 카게야마는 시간을 내달라는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게 다였다. ‘하실 말씀 없으면 가도 되나요?’ 첫날 카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음료만 바라보고 있는 오이카와를 잠깐 기다리던 카게야마가 한숨을 내쉬며 내뱉은 말이다. 그러고는 붙잡을 새도 없이 카페를 나섰다. 오이카와는 제 처지만큼 쓸쓸하게 식어버린 커피만을 내려 보다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전에는 어떻게 대화를 이어갔더라. 카게야마 덕분이라는 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전의 두 사람 관계에서 오이카와가 노력한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헤어지고 나서 우연히 만나게 된 날부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이카와를 괴롭혔다. 근처에 살고 있었기에 언젠가는 마주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빨리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인사해야 하나 이대로 지나쳐야 하나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 카게야마가 먼저 오이카와를 스쳐 지나갔다. 당황한 오이카와가 그의 팔을 붙잡을 때마저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순간 잘못 봤나 싶을 정도로 카게야마는 무심했다. ‘잠깐 대화 좀 해.’ 다행히 카게야마가 맞았는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 진행도 없이 무의미한 시간만 흘려보냈다. 어쩌면 앞에 앉아 있던 카게야마는 정말로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의 기억 속 카게야마 토비오는 단순함의 대표적인 표상이었다. 언제나 그의 머릿속에는 배구로만 가득했었고, 그마저도 생각하는 것들은 얼굴에 쉽게 드러나는 편이었다. 사람을 파악하는 데 도가 튼 오이카와에게, 이때의 카게야마는 손위의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그와 반대로 다시 만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아는 사람 중, 이해하기 힘든 사람에 속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많이 하지도 않지만 하는 말마다 담긴 의미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애초에 카게야마가 제 앞에서 무표정한 적이 있던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게야마와의 이별은, 전적으로 제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던 오이카와의 잘못으로 시작되었다. 익숙지 않은 배려를 낯간지러워했고, 언제나 저돌적인 카게야마의 표현에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저를 좋아하세요?’


그날 카게야마가 무슨 변덕이 생겼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카게야마의 절박한 표정을 봤지만, 연인임에도 불구하고 물어본 게 괘씸해서였을까. 나도 너와 같다는 그 한마디만 돌려줬으면 됐을 것을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다른 날과는 다르게 카게야마도 단단히 마음을 먹은 건지 말을 듣겠다며 물러서지 않았지만, 끝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원하는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제 못하겠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제 뒤에서 카게야마가 간신히 내뱉은 말을 기억한다. 무엇을?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뒤를 돌아봤지만, 카게야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굳게 닫은 채, 흔들리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봤음에도 카게야마는 몸을 돌렸다. 잠깐만! 카게야마를 향해 소리쳤지만 카게야마는 잠깐 멈추는 것 빼고는 미련 없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실 소리를 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카게야마가 잠시 멈추었으니 저가 그랬을 거로 추측할 뿐이다.


카게야마를 싫어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살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나 생각한 적도 있을 만큼 좋아했다. 오이카와는 배구 이외의 것을 1순위로 둔 적이 거의 없었다. 소꿉친구라던가, 가족이라던가. 놓칠 수 없는 인연들이 있기는 했지만, 웬만해서는 배구와 같은 선상에 있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달랐다. 언제부터 스며들었는지는 몰라도 오이카와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배구에서 카게야마를 뺄 수 없기도 해서일까. 그렇다면 이와쨩도 마찬가진데.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표현하는 데에는 굉장히 서툴렀다. 기본적으로 밝은 성격이었지만, 왠지 카게야마에게는 전부를 보여줄 수가 없었다. 부끄러워서일 수도 있고, 과거의 제 질투심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게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올 줄 알았더라면 진즉 성의를 다했을 텐데. 카게야마의 무관심을 받고 나서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조급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 카게야마한테 쩔쩔맨다니. 이전의 저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그렇게 싫어하더니 잘된 거 아니야? 저의 잘못을 알고 있는 이와이즈미가 따끔한 질타를 건넨 데에도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이번에 못 잡으면 끝이다. 오이카와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



카게야마와 잡은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어지기 전, 먼저 와서 기다리는 쪽은 언제나 카게야마였다. 아마 카게야마는 이것보다도 더 일찍 도착했었을 것이다. 오이카와 씨를 기다리는 것도 나름 즐거우니까 괜찮아요. 얼굴을 붉혀가며 이야기하는 카게야마는 제법 귀엽기는 했지만, 오이카와는 괜히 낮부터 무슨 소리냐며 타박을 주곤 했다. 날도 더웠는데 좋은 말 한마디라도 해줄걸.


“…먼저 나오셨네요. 나름 일찍 나온 건데. 죄송해요.”

“아, 일찍 준비해서! 죄송하긴~. 토비오쨩도 약속 시각보다 일찍 온 거잖아. 토비오쨩은 여전하네.”

“뭐 저는 버릇이 돼서.”


카게야마가 도착하고 조용한 정적을 깨고자 과거의 일을 살짝 꺼내 봤지만, 오히려 제 잘못을 떠오르게 하는 말에 오이카와는 결국 입을 닫았다. 카게야마는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을 테지만, 분위기가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놓친 과거를 후회하는 것보다는 주어진 현재에 집중하려 해도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무얼 해야 하지? 연애하면서 이렇게 쩔쩔맨 상대가 있던가. 설령 있다 하더라도 카게야마는 절대 아니었다. 사랑을 받는 데에만 익숙했지, 받으려고 노력한 적은 거의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쓰레기네. 자조적으로 웃으며 카게야마의 뒤를 따라갔다.




제가 내뱉은 말 때문에 어색해졌다는 것을 카게야마는 눈치챘지만, 굳이 말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럴 의도는 없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사실이니까.


약속 장소에서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오이카와를 보자마자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전과는 다르게 기다림이 썩 즐겁지 않을 것 같아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그가 먼저 와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탓이다.


‘그…… 다시 시작할래?’


우연히 마주하게 된 그 날, 제 눈치를 봐가며 어렵사리 재회를 선언한 오이카와에, 솔직히 카게야마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오이카와를 좋아하는 것은 여전했다. 그래서 더 겁이 났다. 사귀는 동안 설렜던 순간보다 오이카와가 저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혼자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오이카와가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어도, 돌아오는 행동들이 사귀느니만 못한다면 사귀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를 좋아하세요? 그것은 카게야마가 던진 마지막 기회였다. 얄궂게도 꿋꿋이 입만 다물고 있는 오이카와를 보고는 모든 것을 놓기로 마음먹었다. 좋아하더라도 혼자 좋아하자. 아무 사이가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잊기 쉽겠지. 더는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처음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는 여전히 제멋대로라고 생각했다. 제 마음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는 건가 싶었으니까. 오이카와와 있으면 복잡해지는 머리로 열심히 답을 정리하고 있던 사이, 오이카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사귀면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사과였지만,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때의 카게야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다.




먼저 몸을 돌려 걸어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다 발을 옮겼다. 두 사람 다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문 채, 예약되어 있는 가게로 향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오이카와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전에는 어떻게 했더라. 카게야마가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가려 해도 죄 막힐 뿐이다.


결국 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진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화를 이끌어가기엔 오이카와는 너무 서툴렀고, 함께 있을 때에는 오이카와한테만 집중하던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밥 먹기에 바빴다. 이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앞서가는 카게야마를 붙잡으려 했지만, 카게야마가 먼저 발을 멈춰 그를 돌아보았다.


“오이카와 씨.”

“으, 응?!”

“이젠 억지로 안 하셔도 돼요. 왠지… 오이카와 씨답지 않아요.”

“…….”

“그, 싫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이러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이에요.”


뜬금없는 카게야마의 말에 오이카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일까. 무언가 부족했을까. 감이 잡히질 않았다. 카게야마가 했던 것처럼 이야기를 해보기도 하고, 비록 몇 안 되는 카게야마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고, 제 욕심을 줄이고 카게야마가 원하는 대로 해봤는데. 제 마음대로 휘두르는 게 가능했던 카게야마는 이제 제 마음을 이 잡 듯 흔든다.


“그럼 내가 뭘 더 해야 하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한 짓이 있으니까! 당연히 네가 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아직도 토비오쨩을 생각하는 건 변함없어. 그런데… 그만큼 힘들어서 아무것도 못하겠어.”


‘오이카와 씨 눈동자만큼 빛나는 건 없을 거예요.’ 언젠가 수줍게 고백한 것처럼 카게야마가 좋아하던, 빛나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는 어느새 차오르는 눈물에 가려진다. 며칠 동안의 감정 기복이 지금에서야 터진 모양이다.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 따라 바닥으로 툭툭 떨어진다.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들을 닦지도 못하고 카게야마의 앞에서 울고만 있었다.


“오이카와 씨 힘들면… 헤어질까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어떻게 하셨으면 좋겠어요.”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카게야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은 생각도 안 하고 고개를 벌떡 들어 세차게 흔들었다. 눈물과 함께 흩날리는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을 카게야마가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늘 그랬듯 저는 오이카와 씨가 원하는 대로 할 거예요. 답을 기다리듯 쳐다보는 카게야마의 두 팔을 오이카와가 세게 붙잡았다. 이제는 놓지 않을 거라는 듯. 눈물도 닦지 않고 전에 없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좋아해. 진짜.”


얼마 만에 들어본 말이었을까. 오이카와의 입에서 좋아한다,라는 말은 과장을 조금 보태서 밤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게다가 이렇게 절절한 말투로.―상황이 그렇다 보니 당연한 거겠지만.― 카게야마는 극적으로 치달아야 나온 오이카와의 고백에 좋아해야 할지, 저 때문에 힘들다는 말에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 기회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다시 만난 오이카와가 저와 정말로 잘해보려고 하는 것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전처럼 여유 넘치지도 않았고, 제 감정을 신경 쓴다는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오이카와 씨가 그런 적이 있던가. 헤어지고 나서야 붙잡는 것은 조금 치사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다만 또다시 이전처럼 상처받고 싶진 않아서, 전의 오이카와가 그러했듯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럼에도 전의 버릇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지 말자 해도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오게 되고, 오이카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건 불가항력의 일이다. 조만간 제대로 관계를 정립하자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오이카와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저도 오이카와 씨 좋아하고 있어요. 그것 말고.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말해주세요.”


이미 다 알지만 그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흔들림 없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눈동자는 어김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하겠지. 저도 그랬어요. 그렇게 말하면 미안하다며 사과할까. 그러기에는 카게야마가 모질지 못했다. 딱히 보고 싶지도 않았고. 다만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으리라. 제 두 팔을 단단히 붙잡은 오이카와의 손을 떼어내지 않고, 그와 눈을 맞췄다.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다시 사귀고 싶어. 이번엔 나도 회피 안 할게. 대신 토비오쨩도 오이카와 씨에게 집중해. ……선 긋지 말고.”


여유가 생겼는지 오이카와는 늘 쓰던 3인칭의 호칭을 사용하며 고백한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오이카와의 것을 카게야마가 듣지 못할 리 없었다. 듣고 싶은 말을 들은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물을 닦아주며 조심스레 안았다. 저도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




“오이카와 씨……….”

“아, 아니. 그게… 토비오쨩 이거 좋아한댔잖아…? 실력 발휘해보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안 되네.”


하하. 오이카와는 어색하게 웃으며 식탁 위에 놓여있던 음식 접시를 살며시 뒤로 숨겼다. 수업이 가장 늦게 끝나는 날, 기말까지 겹쳐서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집에 돌아온 카게야마를 반긴 것은 탄내 가득한 집안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난 건가 싶어 급하게 뛰어들어간 부엌은 마치 폭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무슨 일이 나기는 했네. 아무래도 여러 개가 겹쳐서 집에 늦게 갈 것 같다는 카게야마의 연락에 오이카와는 제 실력을 까먹고 주전부리를 준비하던 모양이다. 의외로 오이카와는 손재주가 없는 편이었으며, 하나가 꼬이면 침착하지 못했다. 배구에서는 안 그러시잖아요…. 배구는 별개야!


애초에 이전에 연애했을 때도 요리는 카게야마의 담당이었으니―그러는 카게야마도 잘하냐고 물어본다면 답은 부정이다. 말 다한 셈이다. 오이카와가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기에, 카게야마는 묵묵히 부엌을 청소하기 위해 가방을 내려놓았다. 어느 정도 눈치를 보던 오이카와도 제가 만든 폭탄을 조심히 내려놓으며 카게야마의 옆으로 가 청소를 돕는다. 토비오쨩 힘들 텐데 미안해. 대신 오이카와 씨가 쏠게! 말고. 저 그거 뭔지 먹어보면 안 돼요? 토비오쨩 깜짝 놀랄걸…. 괜찮아요. 오이카와 씨가 만든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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