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오이] 이제는 영원히
2019. 3. 31. 12:00[오랜 세월, 홀로 살아가던 마왕은 인간을 좋아해 숲속 깊은 곳에 아무도 모르게 제 터를 만들고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조용히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왕의 존재를 두려워하던 인간들은 숲을 태우자는 의견을 모았고, 결국 마왕의 보금자리인 숲을 공격하고 말았습니다. 그에 분노한 마왕은 그들에게 똑같은 복수를 하기 위해, 그 마을을 불태워버리곤 돌연히 모습을 감춰버렸습니다.
사람들의 의식에서 마왕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졌을 때 즈음. 마왕의 보금자리였던 숲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 숲을 멀리 했습니다. 무관심으로 마왕에 대한 여러 소문이 겨우 잠잠해지던 중, 갑자기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고 그 속도가 빠르게 증가하자, 마을의 수장은 그것이 되살아난 숲에서 살고 있을 마왕의 저주라……]
인간들의 두려움에 희생자가 되어버린 마왕은 제 터와 함께 모든 것을 놓아버린 채 달아났다. 아, 마왕이라는 존재가 무서워할 것이 있을 리 없을 테니 달아났다기보다 사라졌다고 표현해야 하려나.
아무튼,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기만 했던 이와이즈미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인간에게, 정확히 말하면 마지막까지 붙잡으려 하지 않은 자신에게 상처받은 눈빛의 마왕을 이와이즈미는 잊을 수가 없었다. 과연 다음에 만날 때도 내가 너를 놓아줄 수 있을까. 너를 만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힘을 기르는 것밖에 없는데, 그래서 결국 너와 적이 되더라도 너는 이해해줄까. 그렇게 마왕에 대한 생각을 혼자만 간직하던 이와이즈미는 어른이 되었다. 오이카와, 내가 어른이 된 것만큼 너도 어른이 되어 있을까.
마왕에 대한 생각이 많아서일까, 어느 새부턴가 마왕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제가 알고 있는 녀석이라면 우리 쪽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제가 기억하던 마왕만을 믿고 너무 안일하게 있었던 탓에, 이상한 소문들이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마왕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그러잖아도 요새 사람들이 죽는 것도 그놈 때문이라면서요.’
웃기지도 않는 소릴. 저들이 말하는 마왕이 제가 아는 그가 맞는다면, 어릴 적부터 사람들을 좋아하던 그 녀석이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코웃음을 치며 소문을 무시하고 있던 이와이즈미에게 수장의 연락이 닿았다.
왠지 거북한 제안이 올 것만 같아 응하지 않아볼까 해봤지만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 이와이즈미는 별 수 없이 수장의 처소로 향했다. 방 옆을 지키고 있어야 할 병사들도 한 명도 보이지 않아 의아했지만, 조심히 수장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슨 일로….”
“자네, 어릴 때 마왕을 만난 적이 있었지?”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골치가 아파질 것 같은 기분에, 이와이즈미는 수장의 귀에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과 함께 있었던 시간은 저만의 추억으로 삼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항상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길 좋아했다. 겨우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마왕의 힘이 두려워 오래 전의 일까지 꺼내 보이는 수장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 녀석이 우리를 떠난 것도 당신들 때문이잖아.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제 위치에 이와이즈미는 제 품 안에 있는 검만을 조용히 만져볼 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되는구나.
수장과의 대화가 끝나고 이와이즈미는 생각에 잠겼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마왕을 물리치는 명목의 토벌대에 들어가라는 수장의 말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저는 둘째고, 또 다른 토벌대를 만들 것이 뻔했기에 이와이즈미는 수장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다.
너를 만나고 싶어 힘을 기른 결과가 너의 죽음밖에 없는 걸까. 고민해봤자 풀리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이와이즈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잠을 청했다.
저보다 먼저 모여 있던 토벌대들은 벌써 떠들썩했다.
우리가 그 유명한 마왕을 만나러 가는 건가요? 야,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하지만 수장님께서…. 수장님도 무서우신 거야, 그냥. 하지만 이미 몇 차례의 토벌대가 없어졌다면서요? 뭐, 소문에 꽁무니 빼고 도망간 거 아니겠어?
마왕을 본다는 긴장감과 설렘, 있지도 않을 존재라는 생각에 드는 허탈함.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 녀석도 가만히 있을 텐데. 이렇게 많은 인원을 벌써 모았을 줄이야. 겁이 많은 수장의 발 빠른 대처에 감탄만 터져 나왔다. 바로 전날, 저를 불렀던 것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나. 여러 반응을 보이는 토벌대 사이로, 그들과 함께 있는 이와이즈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이와이즈미, 어디 아프냐? 함께 힘을 길러오며 결국은 죽음의 동행에 함께 하게 된 동료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수장의 방에서 나오고부터 마왕의 생각에 계속 잠을 설치면서도, 그리고 마왕에게 향하기 전에도, 수없이 되새겼던 다짐과 엇물려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만이 이와이즈미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이와쨩이 오이카와 씨를 찾아오게 되는 날이 온다면, 이와쨩이 아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때가 언제라도 오이카와 씨는 준비되어있을 테니까.’
몇 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쓸쓸한 목소리였다.
* * *
인간들을 피해 숨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의 보금자리였던 숲의 입구로부터 하염없이 걸어 들어와서야 겨우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와 기분 좋게 부는 바람 소리,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와 나뭇잎이 청량하게 흔들리며 내는 소리. 한때는 마치 숲이 살아있다고 착각할 만큼 활기찬 소리가 가득했었지만, 이제는 그저 싸늘하게 타버린 나무들만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방에선 움직이는 가시덤불과 마을 밖에선 본 적도 없는 마물들이 저들을 반기고 있었고 똑같이 갚아주려는 마음도 변하지 않았는지 여기저기서 불기둥이 매섭게 솟아오르고 있다.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그날의 사건으로 극에 달한 모양이었다.
어디 가서 쉽게 죽을 실력이 아니기도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든 장애물이 저를 피해 가는 덕분에―사실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침묵하고 있었다.― 결국 그 모든 것을 헤치고 성에 도착한 것은, 이와이즈미 저 혼자였다.
마왕이 마을을 불태우고 사라진 그 날 이후, 높게 솟은 성에 다시 오게 돼 그를 만나게 되는 날에는 절대적으로 혼자일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해 왔었다. 장담할 만한 계기는 없었으나, 제가 아는 녀석이라면 분명히 그럴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해서 이런 식의 상황을 예측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는 제 발밑에서 뒹굴고 있는, 어쩌면 제 동료들일 수도 있는 사람이었던 ‘것들'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모두. 어쩌면 상황에 맞지 않을 인사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묵념한 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손잡이에 있는 낯익은 문양에 제가 늘 간직하고 있는 그의 선물을 조심스레 손에 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오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열리지 않았을 성의 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이 역시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기에, 이와이즈미는 저를 잡아먹을 만큼 어두운 성 안을 향해 두려울 것 없이 한 발자국 크게 들어섰다.
쾅―. 뒤에서는 문이 굳게 닫혔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일 필요도, 당황할 것도, 조심스러울 것도 없었다. 어릴 적 마주했던 숲의 입구와 마찬가지로 이 문은 저를 기다렸다는 듯 열리고 닫힐 테니까. 이곳에 오지 않았던 세월이 두 손으로는 셀 수 없을 만큼 지났음에도 제 몸과 뇌는 기억하고 있었다. 적막한 기운만이 가득한 이 성 제일 맨 꼭대기에 마왕, 그러니까 제 친구였던 오이카와가 머물고 있음이 분명했다. 뚜벅뚜벅. 적막한 곳을 제 발걸음 소리로 채우며 그가 있을 곳을 향해 올라간다.
“어서 와, 이와쨩. 기다리느라 목 빠질 뻔했다니까?”
성문과 마찬가지로 이와이즈미가 도착하자마자 그를 반기듯 문이 열렸다. 올라오는 내내 여러 생각에 잠기게 할 만큼 어두웠던 복도와는 달리 환한 불빛이 이와이즈미를 반겼다. 반사적으로 찡그려진 눈을 살며시 뜨자, 기억 속의 어린 마왕과 마찬가지로 팔을 넓게 벌리며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오이카와가 서 있었다.
성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오이카와를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익숙한 미소와 마주하고 있으니 어릴 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에도 무슨 일이 있다 한들, 미소를 잃지 않더니―생각해보면 마왕인 오이카와가 무서울 게 뭐가 있겠느냐마는― 그것은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은 오이카와의 미소가 환할수록 밖에서 싸늘하게 죽어버린 제 동료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사실 이와쨩만큼은 오지 않기를 원했는데 말이지. 몇 년이 지나도 영웅 심리는 여전하네―.”
“…헛소리는 그만하고 마을에서 도는 저주, 그거 정말 네가 그런 거야?”
“글쎄…, 하지만 이와쨩, 어차피 오이카와 씨가 그러지 않았다 해도 믿지 않을 거 아니야?”
어깨를 으쓱하던 오이카와는 여전히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내뱉었지만, 그것이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기분이 들어 이와이즈미는 살짝 흔들렸다. 오이카와가 그렇지 않았다 말하면, 곧이곧대로 믿을 자신은 충분히 있는데. 이 숲을 빠져나간 후 만나게 될 수장 앞에서 할 말이 없게 되더라도―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오이카와의 입으로 직접 아니라고 말해주길 원했다. 그 바람을 오이카와가 직접 무참히 짓밟았지만.
‘이와이즈미, 마왕과 네가 더 이상은 친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왕을 죽임으로써 증명해라.’
몇 차례의 토벌대를 만들어 보냈으나 성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숲에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를 접한 수장은 가지고 있던 마지막 수단으로 자신을 선택했다. 자신이 거절한다고 해도 그를 죽이러 올 토벌대를 만드는 것은 수장에게 있어서 큰일도 아니었다. 결국 자신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제로 토벌대에 제 이름이 올라간 순간부터, 명령을 무시하지 못하고 이 숲에 들어왔을 때부터, 오이카와가 제 잘못을 인정한 지금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오이카와를 죽이거나, 자신이 죽거나.
제 목숨을 내놓을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면 또 마왕을 죽이기 위해 토벌대가 찾아올 것이 분명했으며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오이카와를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고를 수 없는 두 가지의 선택지에 놓인 이와이즈미는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오이카와,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진 이와이즈미와는 다르게 오이카와는 무엇이 그리 재밌는 건지 연신 웃음을 짓고 있다.
“…그래도 이 숲으로 들어온 토벌대들을 죽인 것이 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에, 그건 부정 못 하겠다. 하지만 오이카와 씨는 적어도 남이 살던 곳을 아무 이유 없이 공격하지는 않았는걸. 이와쨩도 알다시피 그건 그쪽에서 먼저 잘못한 거랍니다!”
사람의 목숨을 몇 십, 조금 더 보태서는 몇 백을 걷어갔음에도 여전히 오이카와의 웃음은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그 웃음 덕분에 여태껏 계속해서 외면하려던 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 너는 정말로 마왕이 맞았구나. 너에 관한 좋지 못한 소문이 무성하더라도 그것은 네가 한 일이 아닐 거라고, 너를 토벌하러 간 사람들의 죽음은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던 소문들은 다 사실이었구나. 눈치 챘으면서도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너를 옹호한 나 자신 역시 너와 다를 바 없겠구나.
회피하고 있던 사실을 직시함과 동시에, 저를 제외한 오이카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옛날과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이와이즈미는 기사단 망토 속에 숨겨두었던 오이카와의 선물을 그저 손에 꼭 쥘 뿐이었다.
‘아야야… 이와쨩, 아무리 이와쨩이 무쇠 같다고 해도 나무 위에서 떨어지면 죽거든요? 조심 좀 하지? 어떻게 인간이 제 목숨 귀한 줄을 몰라?’
‘다치기야 하겠다만 죽겠어, 설마? 그리고 이 사슴벌레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런 거 어차피 이 숲에선 엄청 많이 볼 수 있거든요?!’
‘야 그나저나 쿠소카와, 너는 다치면 어쩌려고 날 받아!’
‘…오이카와 씨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린 시절, 오이카와가 저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그 나이의 아이들답게 여기저기 쏘다니다 보니 언제든 상처 나게 마련이었고 거기엔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오이카와는 아니었으니까.
오이카와의 하얀 피부는 저와는 다르게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고, 혹여 긁히는 날이 있다하더라도 금세 회복되기도 했다. 나무 위에서 떨어진 이와이즈미를 가뿐히 받은 그날 역시 밑에서 저를 받았던 주제에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아주 말끔히 털고 일어나더니, 심지어는 가시들이 박힌 제 손을 치료해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치료가 마을의 의사가 한 것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부터 제 친구가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깨달았다. 친구가 먼저 말하지 않는 사실을 꺼내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이와이즈미는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어린아이의 호기심이 마왕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이와쨩, 오이카와 씨가 왜 다치지 않는지 궁금해?’
‘음… 역시 아니라고는 말 못는데. 그래도 뭐, 네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해도 돼. 나는 그냥 너랑 노는 게 좋으니까.’
‘헤에, 역시 오이카와 씨 이와쨩이 엄―청 좋아!’
‘그래, 그래. 이제 시간 늦었으니까 나는 집 가야 하니….’
‘그래서 말인데,’
오이카와의 입에서 나오는 좋아한다는 말은 평소에도 많이 들어봤음에도 이번만큼은 어딘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낀 이와이즈미가 시간을 핑계로 일어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옷깃을 붙잡은 오이카와의 떨리는 손에 뒤돌아 마주한 그의 눈빛은, 손의 떨림과는 반대로 단호하게 느껴졌고 덕분에 그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오이카와의 음성은 언제나 저를 반겨주던 숲속의 소리와 함께 어쩐지 스산한 기분이 들게 했다. 제가 아는 오이카와가 아닌 것 같아 오이카와의 뒷말이 궁금했음에도 듣기 싫은 마음에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마왕의 속삭임은 무시할 수 없었고,
‘오이카와 씨 비밀 하나 알려줄까?'
아무도 모르는 마왕의 단 한 가지 비밀은 이와이즈미의 뇌리에서 평생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와쨩, 표정을 못 숨기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속에 오이카와 씨가 줬던 선물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거지?”
이와이즈미는 저도 모르게 손이 제 품에 향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미 늦었지만 급하게 빼냈다. 어릴 적 너는 언제나 나를 꿰뚫어 보곤 했었는데, 만약 그것도 마왕의 힘 중 일부분이라고 한다면 이제 더 이상은 네가 마왕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이미 다 알고 있음에도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오이카와 때문에 결정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그 태연한 태도가 오히려 저를 더 미치게 한다는 사실을 과연 오이카와, 너는 알까.
“오이카와, 그렇게 웃지만 말고 차라리 죽이지 말라고 해라. 아니 차라리 도망가자고 말해, 그러면 너랑 같이 가줄….”
“이와쨩.”
“….”
“오이카와 씨는 이제 더는 인간들을 믿고 싶지 않아.”
나도 인간인데.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투에 이와이즈미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하지만 그 말에도 오이카와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그 미소가 밝기 때문이리라. 변하지 않은 그 미소는, 이와이즈미가 여태껏 오이카와를 잊지 못하게 했던 것 중 하나다.
“하지만 오이카와 씨가 살아있고 이와쨩이 살아 있다면, 난 평생 인간들을 믿어보고자 하겠지.”
“……”
“그것을 이와쨩이 끊어주었으면 좋겠어.”
이와쨩은 오이카와 씨 친구지―?
이와쨩이 오이카와 씨를 찌르는 거야.
한 걸음씩 다가오면서 나지막이 내뱉는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홀린 것처럼 이와이즈미는 제 품에 감춰두었던 검을 빼냈다. 검 손잡이엔 흔히 볼 수 없는 문양이 그려져 있지만, 이 성에서는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문양이었다. 이거 오이카와 씨가 좋아하는 문양으로 만든 검이지롱. 매일 자기 전 무의식적으로 검을 볼 때면 자신의 단 한 가지 비밀을 알려주며 선물이라고 건네준 어린 시절의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떠올라 말없이 검을 끌어안기만 했었다. 인간들에게 배신당하 사라져버린 오이카와가 자신조차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아 그가 미워서 매번 버리려고 했던 검이었지만, 오이카와를 생각나게 해주는 유일한 물건이어서 버리지 못한 채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었다.
난 오이카와를 죽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죽여야 해. 왜? 굳이 내가 죽일 이유가 있을까? 오이카와의 손에 죽은 이들을 생각해 봐. 그건 침범한 그들의 잘못이지 오이카와가 문제는 아니잖아.
오이카와의 말에 홀려 통제력을 잃은 몸을 가까스로 제어하며, 아까까지만 해도 멍해있던 머리에 온갖 생각들이 덮쳐온다. 이와이즈미가 검을 들고 있음에도 오이카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와이즈미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오이카와를 피하려고 발을 떼 보려 애썼지만, 이와이즈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사람을 조종하는 제 목소리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늘 지어보이는 미소로 환하게 웃어 보이던 오이카와는 검을 들고 있는 이와이즈미의 손을 잡아 그대로 들어 올린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오이카와, 너, 미쳤어?! 당장 이 손, 놓아! 이러다 너 진짜 죽는다고!”
“헤헤, 이와쨩의 진귀한 모습을 볼 수 있네. 괜찮아, 이와쨩. 알지? 이대로 단숨에 내리꽂는 거야.”
손아귀의 힘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한낱 인간에 불과한 이와이즈미가 마왕인 오이카와를 이길 수는 없었다. 오이카와의 보금자리였던 숲이 타버리고 사라져버린 오이카와를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해 어린아이마냥 울어버린 그날처럼 이와이즈미는 눈물을 흘렸지만, 오이카와는 끝까지 미소를 보인다. 괜찮아, 이와쨩이라면 난 다 이해해. 오이카와의 힘을 이기기 위해 용썼지만, 끝내 버티지 못한 팔에선 힘이 빠져 버렸고 결국 오이카와가 주었던 선물은 단숨에 그를 향해 내리찍었다.
이와이즈미는 제 품으로 힘없이 쓰러지는 오이카와의 몸을 간신히 받아냈다. 무섭게 올라오던 불기둥에 타버리고 본 적 없던 마물들에 대응하지 못한 채 죽어버린 제 동료들에게는 미안했으나, 이와이즈미는 제 품에 안겨 쓰러진 오이카와가 안쓰럽기만 할 뿐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마왕은 언제나 혼자였고 그의 고독함은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오이카와, 너의 존재가 세상에선 비록 악일지언정 나에게는 항상 선이었다.
‘오이카와 씨 비밀 하나 알려줄까?’
‘…안 궁금하다니까.’
‘이와쨩, 오이카와 씨는 절대 죽지 않아.’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하지만 오이카와 씨를 죽이는 방법이 하나 있지요.’
‘….'
‘전에 주었던 그 칼로 오이카와 씨의 심장을 찌르면 오이카와 씨는 한 번에 숨을 거두게 돼. 이거 꼭 이와쨩만 알고 있어야 해?’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박힌 칼을 빼지도 못한 채 빨간 피만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전략) 사람들의 의식에서 마왕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졌을 때 즈음. 마왕의 보금자리였던 숲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 숲을 멀리 했습니다. 무관심으로 마왕에 대한 여러 소문이 겨우 잠잠해지던 중, 갑자기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고 그 속도가 빠르게 증가하자, 마을의 수장은 그것이 되살아난 숲에서 살고 있을 마왕의 저주라 하여 토벌대를 만들어 숲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매번 토벌대들은 마왕에게 당해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고 결국 수장은 마을에서 유명하다 소문난 용사들만으로 이뤄진 토벌대를 숲으로 보냈습니다. 토벌대의 대부분은 죽고 돌아오지 못했으나 단 한 명의 용사만이 마왕의 성에 들어갔고 드디어 그를 물리치고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마왕이 죽음으로써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마왕의 친구였던 그는 마왕의 죽음을 슬퍼하다 견디지 못하고 마왕이 살았던 성으로 돌아가 제 목숨을 끊었습니다. 수장은 마왕을 그리워하는 용사를 못마땅해 했지만, 그럼에도 제 마을을 위해 공을 세운 죽은 용사의 목숨을 기리기 위하여 숲을 태우지 않고 그 앞에 비석을 세워두었습니다.]
* * *
“―라니, 웃기지도 않지.”
“또 뭐가.”
“오이카와 씨가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잖아! 딱 봐도 거짓말인데 전설이라고 떠든다니. 그리고 ‘용사의 목숨을 기리기 위하여 비석을 세워두었다.’ 이 부분 말이야. 그냥 자기들이 무서우니까 세워둔 거 아니야? 어디서 이와쨩 핑계를 대?”
세간에는 너와 내가 죽었다고 소문이 나 있는데 그걸 어쩌라고. 게다가 그 소문은 네가 그렇게 만든 거잖아. 언제나 굳게 닫혀있으면서도 제 앞에서는 저절로 열리는 문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것은 오이카와가 창문에 걸터앉아 입을 내밀고 불평을 내뱉고 있는 모습이다. 제 노력을 가상히 여긴 건지 책을 놓아둔 수장의 의도는 알 수 없었으나 비석과 함께 놓여있었다. 몇 번을 본 주제에 질리지도 않는지 그날의 일이 적혀 있는 책을 읽고 있었고 그에 나오는 반응도 여전하다. 어차피 늘 하는 것처럼 꼬투리 잡는 것이니 굳이 반박할 필요는 없었고, 오이카와에게 다가가 책을 빼앗을 뿐이었다.
앗, 왜 뺏어! 어차피 외울 정도로 봤잖아. 그건 그렇지만, 재미있단 말이야. 내가 왔는데 안 반겨줄 거야? 헤에, 질투했어? 변함없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오이카와를 그저 말없이 끌어안는다.
이와쨩은 오이카와 씨 친구지―?
오이카와가 선물로 주었던 검으로 그를 찌르기 전에 제 머릿속에 들린 오이카와의 음성이었다. 목소리로 사람을 홀려 검을 빼게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아예 제 머릿속으로 들어오다니. 아, 그게 그건가? 하긴 뭐 어때. 분명 긴장감이 가득한 상황이었을 텐데도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이것도 마왕의 힘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아니 그것은 필히 저에게만 통하는 것일 터였다. 어릴 적부터 무서울 것이 없던 이와이즈미는 유독 오이카와에게 약했다. 오이카와가 마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무시한 채 그의 편을 들었던 이유 역시 오이카와가 마왕이라서가 아니라 마왕이 오이카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와쨩 우리가 꼭 서로를 죽일 필요는 없지 않아?’
‘뭐?’
‘어차피 멍청한 인간들은 그저 오이카와 씨가 없어지는 것만 바랄 뿐이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진짜로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래서? 야, 그런데 꼭 이렇게 이야기해야 하는 거냐.’
‘혹시 누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이와쨩 이렇게 말하는 거 좋아한다는 사실을 오이카와 씨는 다 알고 있다고? 아무튼 인간들은 무서워서라도 이 숲에 오지 않을 테니까 우리 둘 다 죽은 척만 하는 거 어때?! 이와쨩도 오이카와 씨 죽이기 싫잖아?’
누가 듣기는 무슨. 그리고 그런 유치한 생각을 누가 한다고. 하지만 부정하기에는 어릴 적 자신이 떠올라 이와이즈미는 그저 말없이 오이카와의 생각을 듣고 있었다. 숲에서만 살고 있으니 아무도 듣지 못할 소리였지만, 이와이즈미는 제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오이카와의 음성을 좋아했다. 이유는 몰라도 저만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종종 말로 하지 않고 생각으로 대화하곤 했었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을 줄이야. 제 앞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오이카와가 저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또다시 증명되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죽은 척이라니. 호기롭게 외치는 것치고는 밑도 끝도 없는 오이카와의 말에 힘이 빠져 검을 들고 있던 손을 놓칠 뻔한 것을 간신히 다잡았다. 장난기 섞인 말투였음에도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은 아닌 모양이다. 무슨 의미로 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마지막 한 문장만으로 자신을 유혹하기는 충분했다. 오이카와를 내버려 두고 죽고 싶지도, 오이카와를 죽이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이와쨩이 오이카와 씨를 찌르는 거야. 그 검이라서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심장을 찌르지 않는 이상 죽지는 않을 거니까 걱정은 하지 마. 이와쨩이라면 알아서 잘 빗겨서 찌를 수 있다 생각해. 그리고 바로 수장에게 찾아가서 말해. 마왕을 무찔렀다고. 오이카와 씨가 마을에 가지 않고 얌전히 있으면 믿어줄 거야. 그러면 꼭 오이카와 씨에게 와줘야 해.’
시간이 지체될수록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수장이 또 다른 토벌대를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는지 오이카와는 저 혼자 말을 빠르게 하곤 끝내버렸다. 오이카와, 네가 주었던 이 검이라면 내가 잘못 찌르는 즉시 너는 죽는 거잖아. 그런 불확실한 계획은 싫다고 대꾸도 하기 전에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제 머릿속에서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왕이 아닌 자신이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오이카와라면 분명 제가 생각하는 것은 들렸을 것이 확실한데도 귀를 닫은 모양인지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오이카와, 너, 미쳤어?! 당장 이 손, 놓아! 이러다 너 진짜 죽는다고!”
“헤헤, 이와쨩의 진귀한 모습을 볼 수 있네. 괜찮아, 이와쨩. 알지? 이대로 단숨에 내리꽂는 거야.”
그러니까, 그때 나눴던 대화가 마냥 가식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와쨩 그때 진짜 같았어. 일을 해결하고 나서 오이카와가 웃으며 했던 말이었지만, 이와이즈미는 제가 원해서 칼을 들었던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저도 모르게 찌를 것만 같았기에 절실하게 소리친 것이다.
다행히 그의 심장을 비켜 지나간 검 덕분에 오이카와가 죽지는 않았지만 흘러넘치는 그의 피를 볼 때는 심장이 내려앉음을 느꼈다. 오이카와를 죽였다는 거짓 정보를 수장에게 넘기고 며칠 동안 자숙하던 때에도 오이카와가 걱정돼 미칠 노릇이었다. 오이카와가 마왕이라고는 하지만, 피가 그렇게 나면 죽지는 않을까, 일어났는데 자신이 없어 외로워하지는 않을까, 혹여 진짜로 찔렀다고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까.
마을에서 축제가 열려 자신에게 신경이 거둬진 것을 느끼자마자 바로 숲을 향해 달려갔다. 여전히 제 앞에서만 열리는 성문으로 들어간 곳에는 그날과 마찬가지로 팔을 벌리곤 저를 향해 서 있던 오이카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 더는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저까지 죽은 것으로 처리한 오이카와의 말을 들어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오이카와 씨 잘했는데 칭찬 안 해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일같이 창문만 내다보던 자신이 못마땅했는지 오이카와는 입술을 내밀었다. 하여튼 이와쨩은 매정하다니까! 그냥 넘어갈 것을 알기에 금세 표정을 풀은 오이카와를 이와이즈미가 덥석 끌어안았다. 수고했어. 네 덕분에 이젠 떨어져 있지 않아도 돼. 그 말에 오이카와 역시 아닌 척해도 곤두세우고 있었던 긴장감을 풀고는 이와이즈미에게 냅다 안겼다. 그렇게 오랜 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껴안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 대신 그를 껴안는 것은 그 이후로 생긴 버릇이다.
“오이카와 씨는 이와쨩이랑 이렇게 있을 때가 제일 좋아!”
“그러냐.”
수장의 명을 어기지 못하고 오이카와를 죽이러 왔었지만, 결국은 그와 함께 있게 되었다. 수장은 지금도 마왕이 되살아날까 무서워 숲 앞에 저를 빌미로 비석 같은 것을 세워 봉인하려는 듯했지만, 사실상 우스운 일이다. 마왕이 죽지도 않았고 오이카와가 만든 검이 아니고서야 그것은 오이카와의 죽음에 효과가 있지도 않았으니까.
먼저 건드린 것은 그들이었으면서 아직도 죽은―정확히 말하자면 죽었다고 오해하고 있는― 오이카와를 견제하는 것이 마음에는 들지 않았으나, 덕분에 숲에 찾아오는 이는 없었으니 그 하나는 다행이었다. 영원히 그들이 오이카와가 되살아나는 것을 두려워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세상이 오이카와를 마왕이라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제 친구는 오이카와 하나였으며, 그를 몰아간 세상은 적이었다. 세상이 오이카와를 악이라고 한들 저에게는 선이었다. 그렇기에 이와이즈미 자신은 세상을 등지고 오이카와를 선택했다.
“오이카와.”
“응?”
“…토오루.”
“응!”
“이제는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어.”
비록 세상에서 오이카와가 악일지언정, 이와이즈미에게는 언제나 선이었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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