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오이] 만남은 영원한
2019. 3. 29. 22:01평소였다면 교내 코트에서 부원들과 함께 지냈을 아침 11시. 주말이어도 부원들과 배구 연습을 했던 오이카와는 평소와는 다르게 백화점에 온 상황을 떠올리면,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약속을 잡는 것은 아니었지만, 교내 코트에 도착하면 있을 부원들과의 배구를 상상했고 하루라도 연습을 쉰 적이 없어 오늘도 어김없이 학교에 가려고 했다. 그 계획이 무산된 계기는 다름 아닌 친누나의 부탁이었다.
백화점에 타케루가 놀고 싶은 놀이기구들이 새로 생겼으니, 휴일이니까 백화점에 갔다 오라는 누나의 부탁을 오이카와는 거절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조카가 놀고 싶어 하고, 사랑하는 누나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싫었기에 오이카와는 누나의 부탁을 승낙했다.
부원들과 약속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당연히 자신이 학교로 올 거라고 생각했을 이와이즈미에게 연락했다. 배구 생각 말고 타케루나 신경 써. 백화점에 이제 막 도착한 오이카와가 본 이와이즈미의 메시지다. 친구보다 타케루를 더 신경 쓰는 소꿉친구라니. 흥, 괘씸한 이와쨩 같으니라고. 혼자서 투덜거리던 오이카와는 제 곁에서 이상하게 바라보는 타케루의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토오루는 가끔 유치하게 굴 때가 많은 거 같아.”
“…이럴 때는 오이카와 씨 편을 들어줘야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데 왜 내가 토오루의 편을 들어. … 오이카와 씨 이름이나 막 부르지 말아 줄래?! 누나와 똑같은 소리만 골라서 말하는 타케루에, 차마 하고 싶은 말은 다 하지 못한 채 타고 싶었던 놀이기구에나 가라고 손짓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밝아지는 타케루의 표정에 이럴 때는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얄미운 말을 하거나 의젓한 행동을 하더라도 어린애는 어린애라니까. 오이카와는 그 말이 생각나서, 저를 바라보며 인사를 하는 타케루를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걱정이 많은 누나는 어릴 때도 그랬다. 누나는 항상 하나뿐인 남동생을 걱정하기에 바빴다. 그런 누나이기에 사랑하는 아들인 타케루가 넘어져서 다친다면 속상할 것을 아는 오이카와는 안 그런 척해도 타케루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 모습을 알기 때문에 누나가 쉽게 그에게 아들을 맡기고는 한다는 것을 오이카와는 아직도 잘 몰랐다. 아무튼 타케루는 언제나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그 말이 더 걱정되기에 한눈을 팔 수 없었다. 오늘 아침 출발하기 전에도 조심하겠다고 씩씩하게 말한 타케루가 다친다면 누나가 엄청 걱정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타케루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오야오야? 이거, 의외인 사람을 만났는걸?”
오이카와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같은 종목의 운동을 하기 때문인지 아주 가끔 마주했던 목소리라, 낯설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쿠로오 테츠로였다. 여기에 와서 널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는 쿠로오에 오이카와는 헛웃음을 지었다. 도쿄에 있어야 할 녀석이 미야기에 있는 사실이 더 놀랍거든? 오이카와가 왜 그렇게 바라보는지를 그제야 이해했는지 쿠로오는 하던 말을 멈추고는 어깨를 으쓱거리곤 한 곳을 가리킨다.
“오늘 졸업여행 삼아서 올 생각이었는데 켄마가 살 게임기 있다고 하고, 리에프는 저기서 놀고 싶다고 하고. 그래서 배구 부원끼리 놀러 왔거든.”
여유롭게 말하는 쿠로오의 말처럼 타케루가 있는 놀이기구 근처에는 익숙한 몇 명의 얼굴이 보인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배구를 하면서 한 번 정도는 본 적이 있는 얼굴들이었다. 꽤 즐거운 얼굴의 리에프와 타케루가 서로 놀고 있는 모습을 보던 오이카와는 자신이 굳이 끼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리에프의 저 모습은 놀아주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본인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분명했다. 타케루랑 놀아주라고는 했다 해도 배구 이외에 타케루와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던 오이카와에게는 고마운 상황이었다. 반면, 자신의 팀원 모습이 주장으로써 꽤 골치가 아픈 건지 허탈하게 웃고 있는 쿠로오의 모습에, 오이카와도 따라 웃었다.
“켄마가 게임을 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어.”
“흐음, 푸딩 군이 그 생각을 들어준 적은 있고?”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쿠로오 씨라도 상처 받는다고.”
쿠로오와 오이카와는 놀이공원에서 노는 이들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속을 썩이는 부원들 이야기나 각자 자신의 소꿉친구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 여전히 웃고 있는 쿠로오를 보며, 오이카와는 과거 네코마 고교의 경기에서 게임기를 손에 쥐고 있던 코즈메 켄마를 떠올렸다. 확실히 경기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는 게임에 몰두하던 모습을 지나가다 몇 번 보기는 했었다. 자신이 저런 식으로 게임에 집중했다면 이와이즈미에게 이미 크게 혼났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쿠로오를 보던 시선을 다시 타케루와 네코마 배구 부원들 쪽으로 옮겼다.
놀이기구가 뭐 그렇게 재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신이 난 리에프를 이미 말릴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옆에 있던 야쿠도 함께 놀아주고 있었고 켄마는 한구석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리에프도 리에프지만, 그보다 믿음직스러운 야쿠가 옆에 있는 것을 보니 타케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타케루도 자신과 노는 것보다, 네코마 학생들과 즐겁게 놀고 있는 것 같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래도 고양이들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네, 오이카와 씨 대신 타케루랑 놀아주니까.”
타케루? 응 내 조카. 저기 너희 키 큰 고양이랑 놀고 있는 꼬마. 리에프와 함께 웃으면서 놀고 있는 타케루를 가리켰다. 아무리 리에프와 야쿠가 잘 놀아주고 있다고는 해도 혹시 모를 상황이 있으니 타케루에게서 눈을 뗄 수는 없었다. 쿠로오는 시선을 고정한 채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한 꼬마를 가리키는 오이카와에게서 꼬마 아이로 고개를 돌렸다. 리에프가 키만 작았어도 동갑으로 오해했을지도…. 헤, 그 정도야? 오이카와는 농담하는 어조로 말하며 쿠로오를 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꽤 심각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란 말이야?
오이카와는 배구를 좋아하는 것만큼 배구부원들을 관찰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그것은 오로지 선수의 기량을 봤을 뿐이었고 경기만 보고 그 선수 자체를 파악하는 것은 사실상 힘든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같이 생활을 해야 할 텐데 도쿄에 있는 네코마 고교랑은 그것도 쉽지 않았기에―연이 있는 카라스노는 몇 번 시도한 듯싶었지만― 쿠로오의 말에 오이카와는 그저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리에프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나저나 다른 멤버들은? 저렇게만 온 건 아니지?”
“아, 다른 멤버들은 다른 층에서 놀거나 숙소에서 쉬는 중.”
도쿄에서 미야기까지 오는데 피곤했다고 설명하는 쿠로오의 말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비오쨩 같은 배구 바보가 아니라면 피곤한 말이 정답이겠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그를 보면서 쿠로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런 거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눈치챈 쿠로오의 반응이었다.
걱정이 돼 계속해서 지켜보고는 있었지만, 리에프와 야쿠와 함께 즐겁게 노는 타케루의 모습이 마음에 놓였다. 자신보다 더 즐겁게 놀아주고 있는 네코마 고교 배구 부원들의 모습에 제가 없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굳이 여기에 없어도 되겠지?
“타케루는 오이카와 씨가 없어도 고양이 쪽 친구들이 잘 놀아주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같이 다른 곳이라도 구경하러 갈래?”
말 그대로 딱히 어디를 놀러가고 싶거나 무엇을 하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백화점까지 왔으니 다른 곳이라도 가볼까 해서 나온 말이었다. 사실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사랑하는 누나가 부탁한 사랑하는 조카를 낯선 이들에게 맡기기는 힘든 일이었는데. 꽤 이상한 일이다.
그럴까? 그리고 생각없이 내뱉은 말에 쿠로오가 동의를 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아 의외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왜 물어본 건데? 그냥? 흠, 어디를 가야 할까. 막연하게 출발한 상태라서 그런지 갈 만한 곳이 마땅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에 온 손님은 나니까 제대로 소개를 하라고? 나도 여기는 거의 처음이거든? 하여간 오래 이야기하고 있으면 말리는 기분이라니까. 모습은 누가 봐도 고양이인데, 능글맞은 말투는 고양이보다는 뱀을 연상시키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 놀던 타케루를 저 대신에 놀아주는 네코마 배구 부원들을 떠올렸다. 그래, 오이카와 씨를 대신해서 놀아주고 있는데 이 정도는 참아야지.
백화점이 워낙 넓으니 갈만한 곳은 어디든 있겠지. 아, 이제 곧 점심시간이니까 밥을 먹을 수 있을 만한 곳이나 찾아볼까. 그러면 차라리 타케루를 데리고 나머지 배구부원들과 같이 음식점에 갈 걸 그랬나. 혼자 여러 생각에 빠지던 오이카와는 쿠로오의 생각을 묻기 위해,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에서 다시 쿠로오로 옮겼다.
“있지, 쿠로쨩은 뭐 먹고 싶은 음식이라도 있어?”
“꽁치구이라면 뭐든 좋은데. 밥 먹으려고? 애들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쿠로오 역시 오이카와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지금이라도 차라리 타케루랑 그쪽들 불러서 같이 밥 먹을까? 그러지, 뭐. 쿠로오의 이야기가 끝나자 오이카와는 그의 핸드폰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부르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핸드폰이 없는 타케루를 대신해, 핸드폰이 있을 네코마 배구 부원들에게 연락해보라는 뜻이었다.
“야쿠한테 전화할게.”
“헤, 푸딩 군이 더 핸드폰 빨리 볼 거 같은데?”
그건 정답. 라며 웃지만, 켄마한테 전화하면 게임 방해된다고 싫어한다는 쿠로오의 뒷말에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왠지 몇 번이고 켄마에게 전화했다가 켄마의 짜증을 꽤 들은 모양새다. 그나저나 말도 안 했는데, 용케 전화하라는 것을 눈치챘네.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평소 제 친구들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모르는지 오이카와는 쿠로오를 마냥 신기하게 쳐다봤다.
기분 나쁠 정도로 눈치가 빠르거나 능글맞은 태도는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쿠로오가 소꿉친구인 켄마를 배려하는 모습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소꿉친구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고 그 모습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쿠로오와 켄마를 생각하면 당연하게도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자신을 생각해주고 배려해주는 이와이즈미지만, 오이카와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거나 마음에 안 들 때는 등을 스스럼없이 때리는 그였다. 그것이 애정에서 비롯됨을 알기에 저도 함께 그를 놀리는 말을 하는 사이였다. 소꿉친구는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허물없이 대하면서도 생각해주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했기에 쿠로오와 켄마를 보면 서로를 챙기는 모습은―물론 거의 쿠로오만 챙기는 편이었지만― 꽤 낯설었다. 이와쨩만 그런 건가? 어깨를 으쓱이던 오이카와는 작게 웃었다. 이와이즈미 역시 자신을 제일 이해해주는 사람이라, 부럽다기보다는 두 사람의 모습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런….”
또 여러 생각에 잠겼던 오이카와는, 무언가 문제가 생겼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를 끊는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방금 야쿠와의 짧은 전화에서 문제가 있었던 걸까. 그의 소꿉친구인 켄마가 무슨 일이 생겼을까. 아니면 타케루? 쿠로오가 대답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그저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자신을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던 쿠로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게, 이미 먹었다네. 에?
그의 이야기는 요약하면 그랬다. 놀이기구를 타며 놀던 타케루와 리에프가 배고프다고 야쿠에게 이야기했고, 이제 곧 점심이니까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쿠로오와 오이카와에게 이야기를 하려던 야쿠였지만, 이미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노는 것에 집중하던 타케루와 리에프, 도착한 후로 쭉 게임에 집중하던 켄마 모두 두 사람이 어디에 갔는지 모르고 있었고 그건 야쿠도 마찬가지였다. 쿠로오에게 전화를 했지만, 전화도 받지 않아서 기다릴까 고민하던 도중 계속해서 배고프다 말하는 타케루와 리에프 때문에, 기다릴 수 없었던 야쿠는 어쩔 수 없이 근처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라도 먹자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근처에 먹을 곳이 딱히 없었나 봐. 야쿠가 꼬마한테 햄버거 먹여서 미안하다고 전하래.”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야쿠의 성격상 타케루에게 좋지 않은 일을 굳이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괜찮아, 오히려 고마운걸~. 그쪽들 덕분에 타케루도 놀고 있고, 이런 날 아니면 언제 먹겠어. 그건 그래, 부모님들은 못 먹게 하는 편이니까. 응, 우리 누나도 그렇거든. 이왕 이렇게 된 거 둘이서라도 같이 점심 먹을까? 어쩌다 보니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새 점심까지 같이 먹게 되었다.
“아무거나 괜찮아? 뭐, 나는 꽁치구이가 아닌 게 조금은 안타깝지만~.”
일부러 계속 꽁치 타령을 하는 쿠로오를 밉지 않게 째려 본 오이카와는 근처 식당으로 마구잡이로 그를 끌고 들어왔다. 사실 아까 전부터 배에서 나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배구하는 것보다 괜찮을 거라며, 어린아이의 체력을 무시한 채 아침을 먹지 않고 나온 것이 패인이었다. 이 이상 밖에 있다가는 저 능글맞은 고양이 귀에 소리가 들릴 것이 분명했고, 그것은 오이카와가 바라지 않는 상황 중 하나였다.
오이카와는 식당에 들어와 제 앞에 앉아 있는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이와쨩이 이 모습을 본다면 어떤 표정일까? 아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겠지. 사실 그가 아니라도 오이카와를 아는 다른 누군가라면, 오이카와가 의외의 인물이랑 식사를 하려고 앉아있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낄 것이다. 물론 시라토리자와의 우시지마나 카라스노의 카게야마와 밥을 먹는다고 하는 것보다는 덜 놀라겠지만, 제대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던 인물과 함께 먹고 있다는 말에는 놀랍다는 표현 이외에 마땅히 쓸 만한 표현이 없었다.
세이죠랑은 싸운 적도 많이 없고 지나가다가 몇 번 보고 만 사이인 네코마의 주장인 쿠로오와 식사라니. 아직도 낯선 이 상황 속에서 오이카와는 메뉴판만을 쳐다봤다. 천천히 먹든, 빨리 먹든 간에 타케루와 리에프 네 무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상 쿠로오와 쭉 같이 지내야 한다. 딱히 쿠로오와 노는 것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나오게 된 일탈에 오이카와는 괜히 들떴다. 타케루만 누나에게 말 안 하면 되는 거 아냐? 마음도 여유로워지니 쿠로오와 함께 있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쿠로쨩은 뭐 먹을래? 글쎄…, 먹고 싶은 게 많아서 일단 한 번 훑어보고. 이게 뭐 중요한 거라고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쿠로오를 보며 오이카와는 또다시 고민에 잠긴다. 용돈도 꽤 많이 남았고 이 정도면 가격도 괜찮기도 하고, 쿠로쨩을 데려온 것은 오이카와 씨니까 내가 내는 게 낫겠지? 아, 거절하려나. 도대체 성격을 종잡을 수 없단 말이야.
“음식 골랐어? 나는 정식 먹을 생각인데.”
“그럼 나도 같은 거.”
오늘따라 많은 생각을 하며 오이카와는 쿠로오의 말에 메뉴판을 쳐다보았다. 우연히 들어온 식당이었는데 다행히도 정식에는 꽁치구이가 있었다. 뭐, 억지로 끌고 들어온 것 같아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오야? 그런 걱정도 했어? 오이카와 씨 이래 봬도 꽤 섬세한 사람이거든요? 네~, 네. 건성으로 내뱉은 쿠로오의 대답에 제가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는 기분인지라 또 한 번 쿠로오를 째려보니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점원을 부르고는 능숙하게 주문을 한다. 켄마랑 오면 항상 내가 주문하거든. 아, 그럴 것 같기는 하네. 오이카와는 그의 말에 수긍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웃으며 쿠로오는 제 주머니 속에서 꽤 귀여운 지갑을 꺼내 보였다.
“점심은 내가 살게.”
“에? 쿠로쨩이 사려고?”
당연히 자신이 낼 생각을 하고 있었던 오이카와는 쿠로오의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항상 자신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대화하는 편이었으나, 어쩐지 그와 있으면 계속해서 당황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쿠로오는 저보다 더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어차피 미야기에 놀러 온 사람은 이 선량한 쿠로오 씨이고, 점심 값으로 백화점에서 에스코트나 좀 부탁할까, 해서.”
아아, 자신이 평소처럼 웃던 모습으로 상대방을 대했을 때, 상대방의 심정은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익숙지 않은 상황이라 그저 쿠로오의 말만 듣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쿠로오는 싫으면 말고, 라는 말과 함께 웃는다. 싫단 말은 안 했거든요? 오야오야, 그럼 오이카와 씨는 쿠로오 씨의 데이트 신청을 수락하시는 겁니까? 엑, 데이트?! 말은 그렇게 해도 어차피 오늘 저녁까지 타케루와 놀고 오라는 누나의 말이 있었기에 쿠로오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크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제안이라, 긍정의 의미로 끄덕인 오이카와의 얼굴을 바라보던 쿠로오는 다행이라며 웃었다. 우리가 가봤자 거기서 뭘 하겠어. 서로 할 일이 없던 사람이니 괜찮은 제안이지? 오이카와는 자신이 한 말에 자신이 만족하고 칭찬하는 쿠로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 잠시 고민하다, 이와이즈미 앞에서 자화자찬하던 과거가 떠올랐다. 물론 자신은 그런 말을 시작하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와이즈미한테 맞곤 하지만. 그 생각이 쿠로오와 자신이 마치 동급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어라, 진짜 동급인가? 아니야, 동급은 아니지. 암.
또 혼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자, 앞에서 쿠로오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앞에다 두고 또 무슨 생각을 하실까?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저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모습에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과 대화할 때면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오이카와가 오늘은 이상하게도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아무래도 그의 성격이 익숙지 못한 타입이기 때문이려나. 왠지 오늘 하루 내내 이 생각만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 착각이기를 바랐다.
“그나저나 놀러 왔으면 부원들이랑 같이 놀아야 하지 않아? 이렇게 잘생긴 오이카와 씨랑 놀고 있어도 괜찮은지 몰라.”
오늘 하루 계속해서 그에게 당하고만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오이카와도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제 입으로 직접 저를 잘생기다고 하는, 다른 사람이라면 하지 못할 법한 그 말을 들은 쿠로오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흥, 오이카와 씨만 당할 수는 없지. 당황한 모습을 의기양양하게 쳐다보려고 했지만, 어느새 쿠로오는 저와 똑같은 웃음을 짓고 있다.
“조카와 뭐하고 놀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은 잘생긴 오이카와 씨를 친절한 쿠로오 씨가 놀아주는 거죠~.”
당황하라고 한 말이었지만 똑같이 이용해서 받아치는 것도 그렇고, 거기다가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에 오이카와는 아까 전 쿠로오와 마찬가지로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이야기하는 거야? 눈치가 없기로 소문난 카게야마나 우시지마, 순수해서 가끔 제 속을 썩이는 킨다이치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저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익숙지 않은 상황에 오이카와는 그저 얄미울 뿐이었다.
쿠로쨩, 그런 사소한 것에 집요한 남자는 매력 없거든? 할 말이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아 조용히 투덜거렸지만, 만약 이 모습을 타케루가 본다면 분명 또 한소리 하겠지. 토오루도 지금 사소한 거에 태클 걸고 있잖아,라고. 가만 생각하니 왠지 쿠로오를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꽤 많은 기분이다. 그의 켄마 같은 존재인 이와이즈미라던가, 저를 놀리는 것이 보이는 말투를 볼 때면 저보다 한참 어리면서 족족 태클을 거는 타케루라던가, 또 눈치라고는 배구에만 있는 카게야마나 우시지마라던가. 어쩌면 쿠로오는 자신에게 꽤 성가신 존재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 고민이 많은 사람처럼 표정을 짓고 있네. 아까부터 앞에 사람 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너 때문이거든? 꺼내지 못할 말은 아니었으나 또 이야기를 했다가는 왜 그러냐고 제 속을 뒤집을 것이 뻔했기에 얄밉게 쳐다보기만 할 뿐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 쿠로오는 마치 어떤 상황이라도 자신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물론 제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그의 소꿉친구인 켄마가 왜 그를 피하는 이유를 제게 물어본다면, 오이카와는 쿠로오가 지금 짓고 있는 자신만만하다는 표정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왠지 불편하단 말이야. 빨리 밥이나 먹고 타케루에게 가야겠다.
“그나저나 졸업 시즌인데 쿠로쨩네는 이미 진학 정하는 건 이제 끝났나?”
“아, 뭐, 이제 막 끝나서 다들 갈 학교를 정한 상태지.”
쿠로오는 음식을 가져다준 점원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다 답할 때를 놓칠 뻔한 것을 겨우 답했다. 많이 만나지는 않았지만, 볼 때마다 생각하는데 잘생기긴 했다. 그리고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고. 자신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주문을 받기 위해서, 그리고 음식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실랑이를 벌였다는 것을, 분명 오이카와도 눈치챘을 것이다. 게다가 그 시선을 즐기면서 테이블로 다가온 승자에게 웃음까지 보여주는 여유까지. 여유로운 모습에 쿠로오는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대단해. 오이카와 같은 케이스를 많이 접해보지 않은 탓일까, 쿠로오도 그에게 흥미를 갖고 있었다. 물론 제가 그에게 휘둘리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과 함께.
“그런데 진학은 왜, 갑자기?”
“아, 우리 학교도 이제 막 끝났거든~. 우리 주전 멤버 중에서는 아무도 오이카와 씨랑 같은 학교가 없더라고. …어느 정도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결과가 나오니까 놀랐어.”
오래전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어도, 역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힘든 일이었다. 3년 동안 배구를 함께 하면서 그들과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서로의 학교가 나온 날에는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 언제나 같은 학교였던 이와이즈미가 저와 다른 학교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더 놀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배구로 진학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생각하는 것과 직접 듣는 것은 역시나 느낌이 달랐다. 오죽하면 더는 그들과 함께 배구를 못 한다는 사실이 아쉬워서 같은 학교에 가자고 이야기를 해볼까, 잠시 고민할 정도였다. 물론 이 말을 꺼냈다가는 이와이즈미에게 한소리 들을 것을 알기에 오이카와는 그저 생각에만 그쳤다.
“확실히 생각하는 거랑은 느끼는 게 다르지.”
“엑, 쿠로쨩도?”
“그럼. 오이카와 씨처럼 소꿉친구는 아니지만 같이 배구하고 있는 야쿠나 카이라던가, 같은 반 친구들도 있고? 하지만 친구라고 해서 모두 같이 가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으니까.”
우선 배구로 가는 사람들도 몇 없기도 하고. 아, 우리도 배구로 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더라. 쿠로오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오이카와는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쿠로오의 분위기에, 그리고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게다가 이와이즈미에게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는 자신에게도 또 놀라고. 이와이즈미에게 맞을까 봐, 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걱정할 그를 알기에 오이카와는 서로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때에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쉽네. 그러게. 그리고는 별말 없었다. 쓸쓸해진 제 마음을 알아준 건지, 아니면 그저 밥을 먹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침부터 계속해서 능글맞게 대꾸하던 쿠로오가 조용했다. 이와이즈미가 아닌 타인과의 침묵은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왠지 쿠로오와는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오이카와 씨 좀 이상해진 것 같아.
“밥도 다 먹었겠다, 오이카와 씨 조카 데리러 가볼까?”
“응? 더 안 놀고?”
“조카 걱정될 거 아냐~. 오야? 쿠로오 씨랑 놀고 싶은가 봐?”
“… 아니거든?”
물론 오이카와 자신도 왜 저런 말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놀고 싶었나? 아닌데. 빨리 헤어지고 싶은데. 이런 휘둘리는 감정은 별로야. 그저… 그래, 그저 당연히 놀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당황한 나머지 이야기가 나온 것일 터였다.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그에게 휘둘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그나저나 오이카와 씨는 학교 어디로 진학했어?”
“오이카와 씨는 배구 추천 들어온 곳 중에서 하나 정했답니다. 배구로 유명한 대학이 얼마 없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
흠, 그래? 왜? 그러고 보니 쿠로쨩은 대학 어디야? 비밀이랍니다~. 뭐야, 오이카와 씨는 말해줬잖아! 그거야 오이카와 씨 사정이고~. 사실 비밀로 할 거리도 되지 못했지만, 쿠로오는 옆에서 계속 궁금해하는 오이카와의 반응이 즐거운 나머지 타케루와 그의 일행을 만나기 전까지도 꺼내지 않았다. 오이카와 씨 은근 귀엽네~. 물론 이 이야기를 했다가는 뒷감당이 되지 않을 것만 같아 말하지는 않았으나, 내년이 기대되는 쿠로오였다.
“타케루! 가자!”
“에? 벌써? 토오루 조금만 더 놀고 가자!”
“고양이…, 아니 저 형들도 바쁠 거야. 이제 방해하지 말고 다른 거 하러 가자.”
고맙다고 인사하고! 타케루는 가고 싶지 않아 보였지만, 오이카와는 단호했다. 놀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씩씩하게 인사하는 타케루의 손을 잡고 오이카와는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둘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야쿠는, 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쿠로오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툭 쳤다.
“야, 너 오이카와랑 같은 학교 됐다고 하지 않았어?”
“응? 아, 맞아. 왠지 대학 생활이 굉장히 재밌을 것 같단 말이지.”
특유의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 쿠로오에 야쿠는 진심으로 오이카와를 응원했다, 저와 마찬가지로 그의 고생이 훤한 미래가 보였기 때문에.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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