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오이] 타인의 시선 (8)
2017. 11. 19. 20:16
Kunimi #1.
‘어디로 갈 거야?’
‘당연히 세이죠.’
졸업식 전에 만난 배구부원들과 나눴던 대화 중 일부였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그 녀석들이 어디를 가든 관심 없었기에 그냥 대충 대꾸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니 딱히 미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개중에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 있던 대부분은 카게야마를 향한 적대적인 질문이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카게야마에게 들리게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은 조금 치졸해 보이기는 했으나, 그에 힐긋 쳐다보며 제지하지 않은 채 방관한 자신도 있었으니 할 말은 없었다. 어린 날의 치기 어린 질투, 정도라고 해두자.―지금도 어리거든? 이라 말한다면 답을 회피하겠다.―
세이죠 자체는 처음이었어도, 어차피 반 이상은 봐왔던 친구들이었으며 지나다니는 선배들 역시 키타이치 출신들이 많아, 딱히 그 분위기가 어색하지는 않았다. 제 성격 상,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오히려 가만히 내버려 두는 편이 도와주는 일이다. 배정된 반에 도착해 제 자리를 찾아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우연히 반에 있던 킨다이치가 인사를 건네며 자연스럽게 옆으로 찾아왔다. 너도 참 끈질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굳이 내치지 않는 저도 내심 킨다이치가 반갑기는 했던 모양이다.
“배구부 들 거지?”
밑도 끝도 없이 다가와 하는 말이 또 하필 배구다. 네가 그 배구 바보냐? 어이가 없어 한소리 하려다 킨다이치의 음성이 괜히 쓸쓸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만 두었다. 그 질문 하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그를 나무랄 수는 없었다.
글쎄. 왜? 안 하려고? 안 한다고는 안 했거든. 그럼 할 거야? ……뭘 자꾸 물어봐.
언제나처럼 성의 없이 대답하는 제 말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킨다이치는 앞자리에 있던 의자를 빼내 앉곤 한숨을 길게 내쉰다. 어차피 할 거면서 뭘. 이것에 대한 답도 알고 있었으니 굳이 내뱉지는 않았다. 마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배구에 큰 흥미를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이 부분에 킨다이치가 속해 있는지는 모른다.― 그 독재적이었던 제왕을 이기고 싶다는 생각은 같을 터였다. 다른 녀석들이라면 몰라도, 카게야마의 옆에서 갖은 수모를 겪은 킨다이치와 자신에게는 그것이 제일 큰 목적이었다. 적어도 그건 성공해야지. 살면서 가장 비장하게 노린 목표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한다. 배구를 좋아한 것은 제왕뿐만이 아니었고, 그래서 더욱 저들의 배구가 무시당했던 그 날의 시합은 몇 년이 지나도 절대 잊지 못할 날이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저들과 비슷한 상황이면서도, 저들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한 선배가 있었으니 제왕과의 싸움은 해볼 만한 시합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했다. 선배들에게 지금 저들의 상황이 어떻게 비춰보일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제가 아는 그들이라면, 저들이 겪은 그 날의 일을 더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해 했을 사람들이었다. 배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선배들이 자신들이 벼르고 있는 상대랑은 다를지라도, 특히 카게야마와 연관된 일이었으니 그 선배에게는 그날의 일이 더 남다르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날 봤을까, 라는 의미 없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선배들이라면 분명 자신들의 시합을 끝까지 지켜보고 카게야마뿐만이 아닌, 모두의 행동을 분석했을 사람들이었다. 선배들은 과연 제 후배들이 시합에서 서로 안 맞다 결국,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괜스레 무거워진 마음에 책상에 고개를 묻으며 애써 생각을 지우려 노력했다. 물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킨다이치를 위해 다시 고개를 들어야 했지만.
* * *
“오, 쿠니미 쨩이랑 킨다이치네?!”
망설일 것도 없이 신청서에 배구부를 적고 체육관이나 구경하기 위해 들른 참이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익숙한 남자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나름 빠르게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치 빠른 것은 여전한지 다가오던 남자, 그러니까 저들의 선배였던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엑, 쿠니미 쨩 방금 인상 찌푸렸지? 아닌데요. 맞잖아! ……선배는 여전하시네요. 응? 아니에요. 반갑습니다. 선배, 오랜만입니다! 응, 킨다이치도 오랜만~.
어김없이 상쾌한 선배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학교로 진학했고 같은 부서에 입부했으니 아예 마주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벌써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선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존경하는 쪽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마도. 물론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을 것이 분명한 터라, 본인에게는 절대 직접 말하지는 않을 거지만. 아무튼 가장 만나고 싶었으면서도, 지금 저들의 모습으로는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 옆에 붙어있는 이와이즈미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나저나 역시 두 분은 세이죠에서도 함께시구나. 하긴, 따로 있었으면 오히려 걱정되는 사람들이었지. 비록 함께한 것은 1년이 다였지만, 그 1년만으로도 그들의 유대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중학교 때와는 두 선배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느꼈다.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 없어서 답답했지만. 뭐지, 이 기분.
“수고했어.”
뒤늦게 걸어온 이와이즈미 선배가 대뜸 건넨 말이다. 그저 인사만 나누고 있던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사일지라도, 저들에겐 딱 맞는 인사였다. 역시나 그날의 시합을 보고, 어느 정도 이해는 하는 모양이다. 그 말에 울컥한 킨다이치의 눈이 빨개졌다는 사실은 나머지 셋만의 비밀이었다. 애써 울음을 참고 있는 킨다이치를 보던 자신도 결국 벅차오르는 감정을 완벽하게 누르지 못했기에, 결국은 셋이 아닌 두 선배의 비밀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오랜만에 만난 선배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드릴 수는 없는데. 고개라도 숙일까. 제 고민이 무색하게도 오이카와 선배와 이와이즈미 선배는 발을 옮겼다.
“앞으로가 있잖아. 잘 부탁한다.”
“이따가 봐~.”
킨다이치의 어깨에 무심하게 손을 얹은 이와이즈미 선배는 단순하지만 힘이 되는 말을 하며 먼저 자리를 떴고, 오이카와 선배 역시 옆에 있던 제 등을 툭 치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킨다이치는 시간이 조금 흘러서야 겨우 울음을 참고선, 비장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았다. 굉장히 웃긴 표정이었지만 킨다이치와 같은 상황이라 자신도 마음 편히 웃을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잘 하자. 그래.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의미의 눈빛을 주고받고 있을 때, 장난기 가득한 대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와쨩, 솔직히 말해 봐. 킨다이치 머리는 손이 안 닿으니까 어깨 만진 거지? …네가 오늘은 덜 맞았나보다? 으악 폭력은 나빠요! 이게 진짜?! 헉, 이와쨩 진짜 때…, 아니 왜 먼저 가는 건데! 같이 가, 이와쨩! 네가 느린 거거든? 빨리 와. 응!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지만, 정말로 저들을 향한 선배들의 태도가 변하지 않았음에, 그간 불편했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동시에 어깨와 등에 남아있는 온기는 선배들의 대화만큼 따뜻했다. 그리고 모순적이지만 그들만의 장난스러운 모습들은 여전했음에도, 앞서가고 있는 뒷모습은 제가 기억하는 선배들의 마지막 시합 때의 뒷모습보다도 훨씬 믿음직했다.
주전으로 뽑히지 못했던 키타이치 시절에는 그저 밖에서만 지켜보았던 선배들의 뒷모습이다. 같은 코트 위에 함께 설 수 있다면 한 번쯤은 지켜보고 싶었던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두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결심했다. 그들과 함께 ‘제왕 카게야마’를 반드시 꺾고 싶다고.
* * *
부 활동이 필수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친구들은 고민에 빠진 듯 보였다. 무슨 부에 들어가지? 나는 이게 하고 싶었어! 등 여러 생각들을 공유하고 있는 가운데, 킨다이치와 자신은 고민도 하지 않고 배구부를 작성했다. ‘어, 너희 배구… 계속하려고?’ 키타이치 시절, 카게야마 옆에서 같이 배구를 했던 친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어왔다. 솔직히 ‘그때’이후로 제가 배구를 다시 한다면 미친 게 분명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대로 그만두게 된다면 카게야마에게 영영 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또 아직도 쓰러지지 않은 선배들과 배구하고 싶기도 했다.
“오, 너희 배구하려고?”
“우와, 우리 학교 배구부 유명하다며! 게다가 잘생긴 선배들도 엄청 많더라~.”
그럼 누구 선배들인데. 배구 이야기에 외모 이야기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있나 싶었으나, 오이카와 선배가 있는 한 이야기는 끊이질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굳이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제 이야기도 아니건만 뿌듯한 마음이 들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킨다이치는 이미, 제 칭찬인 마냥 바보같이 웃으며 친구들의 말에 동조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뭐하냐! 매번 시라토리자와 때문에 4강에서 멈추고 전국도 못가던데. 차라리 다른 부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아?”
적어도 키타이치는 아닐 테고―키타이치 모든 학생의 얼굴을 외우는 것은 아니지만, 키타이치 출신이라면 절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악의로 한 말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바보같이 웃던 킨다이치의 웃음도 뚝 멈췄고, 제 표정도 점점 가라앉았다. 원래도 좋지 못한 표정에서, 바로 티가 났던 모양이었다.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는지 옆에서 그만하라 옆구리를 찌르자, 친구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시라토리자와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는 이길 거거든?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기에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이번에라도 이기면 되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벤치 멤버에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비장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선배들에겐 시라토리자와뿐만 아니라 이제는 카게야마도 등장했으니 그 분위기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제 착각일 줄 누가 알았으랴.
“안녕! 주장인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해. 뭐, 낯익은 후배들도 있고 처음 보는 후배들도 있는데, 앞으로 잘 부탁해!”
“부주장인 이와이즈미 하지메다.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녀석 꽤 실력 좋으니까,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
“이와쨩!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이와이즈미가 맞는 소리했네.”
오이카와 선배는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옆에 있던 이와이즈미 선배는 가볍게 웃으며 오이카와 선배를 향해 손가락질했고, 옆에 있던 분홍 머리 선배와 나른한 표정을 지은 선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 선배가 군기를 잡는 사람은 아니었다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편한 분위기일 줄이야. 자기소개라곤 해도 거창한 것이 아닌, 출신 학교나 포지션 등을 말하는 시간이었지만 모두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분위기는 경직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선배들이 농담해준 덕분에, 굳어있던 1학년들의 표정도 서서히 풀어져 갔다. 저와 킨다이치 역시 마찬가지였고. 뒤이어 나머지 선배들의 인사가 끝나고, 새로 입부한 1학년들도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들에 들뜬 부원도 있었고, 가벼워진 분위기에도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나간 부원도 있었다.―두말할 것도 없이 킨다이치는 긴장한 부원 쪽에 속해 있다.―
오이카와 선배는 자기소개가 끝나자 다른 말없이 깔끔하게 해산하라 했지만,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1학년들은 자연스레 선배들을 찾아 나섰다. 키타이치 출신들은 뇌리에 남아 있는 마지막 시합 선배들에게 선뜻 다가가질 못했다. 저들의 잘못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떳떳하게 있을 일도 아니었다.
옆에서 지켜보진 않았어도 어렴풋이 눈치챈 3학년 선배들도, 카게야마의 성장을 조금은 겪어본 2학년 선배들도, 저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질도, 위로도, 그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까이 다가와서는 앞으로만이 남아 있다며 미래의 일만을 생각하자 말해주었다.
키타이치를 졸업한 친구 중에는 시합에 나가지 않았다 해도, 제왕님의 독재를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며 배구를 그만둔 사람도 있었고, 제왕님이 없는 세이죠에서 그를 이기자 다짐한 사람도 있었다. 후자에 속한 키타이치 부원들 대부분은 꽤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게 선배들 눈에 띈 모양이었다.
“표정 풀어~. 누가 보면 전쟁 나가는 줄 알겠다. 작년 시합 보기도 해서 왜 그런지 알아. 그래도 우리, 즐기면서 하자고?”
오이카와 선배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다가와선, 제 어깨 위에 팔을 걸치며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선배 무거우니까 이 팔 좀 내려주시죠.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반항했으나 역시 듣질 않는다. 후배 괴롭히지 말랬지? 악, 아파! 이와쨩! 뒤에서 이와이즈미 선배가 아프지 않게―맞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이와이즈미 선배니까, 라고 답하겠다.― 머리를 쥐어박고서야, 오이카와 선배는 팔을 내려놓았다.
“많이들 위축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동안 고생했어.”
“그래. 그리고 마냥 지지만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같이 즐기면서 하는 거야! 이 오이카와 씨만 믿으라고~?”
고작 1학년인데. 벤치 멤버에도 넣기 힘들 1학년. 저들에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정할 수 있을까. 함께 한 시간은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선배들은 저들을 이해하고 함께하자 했다. 배구를 하자고 마음먹었다고는 하나, 작년의 불화가 머릿속에서 완전히 떨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배들의 서툴지만, 다정한 위로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립니다!”
저뿐만이 아닌, 함께 있던 키타이치 출신 배구부원 모두가 오이카와 선배와 이와이즈미 선배, 그리고 나머지 선배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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