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오이] 타인의 시선 (2)
2017. 11. 19. 20:07
Matsukawa #1.
“마츠카와, 넌 어디로 들어갈 거야?”
이제 막 말을 트기 시작한 친구가 의자에 앉아 있는 제 옆으로 찾아와서는 물어 왔다. 글쎄,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턱을 괴고 흥미 없다는 듯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한 번 봐 보기라도 하라며 종이 한 장을 건네기에, 마지못해 받아서는 위에서 하나씩 훑어보았다. 중학교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많은 수의 동아리가 있기는 했으나, 제 눈에 대번에 들어오는 것은 그다지 없었다. 아마도 부 활동에 큰 흥미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꼭 한 가지씩은 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 나, 어쩔 수 없이 제일 귀찮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자수나 꽃꽂이? 내가 하다가 때려 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밴드? 공연 나가거나 해야 할 테니 기각. 방송부도 귀찮을 것 같아. 흠, 애니메이션……은 내가 못하잖아. 뭐야, 할 게 없네.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역시 호감이 가지 않는 것들에 속으로 갖가지 이유를 대가며, 하나씩 제외해가고 있던 제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배구부.’
흥미 위주기는 했어도 중학교 때에도 배구를 했던 저에게는 그나마 의 것들 중에서 제일 와 닿은 것이었다. 경험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니 꽤 괜찮을 것 같지. 옆에서 저와 같은 부에 들어가자고 꼬드기고 있는 친구에게는 미안했지만, 이미 배구부로 마음을 잡고 있었다. 아까 받아 놓았던 입부 신청서에 제 이름을 적고 책상 위에 내려놓으니 이번에는 다른 친구가 다가와 말을 걸어온다. 사실 조금은 귀찮았지만 앞으로의 무난한 학교생활을 위하여, 적당히 대꾸해주자고 마음먹었다.
“어? 마츠카와 너 배구부 들어가려고?”
“응. 왜? 무슨 문제라도 있냐.”
진심으로 모르냐고 물어보는 친구의 얼굴에 고개를 끄덕이자 친구의 표정이 급속도로 변해 가는 것을 느꼈다. 아니, 뭐 모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이해를 할 수 없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친구는 제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그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 등의 말만 계속할 뿐이었다. 아, 얘 좀 귀찮은 타입이네. 야박하지만 친구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내린 후, 제 옆에서 다른 이야기만을 해대는 친구의 말을 언제 끊어야 하는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에서야 비로소 그는 본론을 꺼냈다. 친구의 말이 길었기에 간단히 줄여 보자면, 결국에는 제 학교가 배구부로 유명하다는 이야기였다. 하려고 마음도 먹었겠다, 이왕이면 제대로 되어 있는 게 좋으니까, 그렇다면 더 괜찮은 거 아닌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끝냈을 때쯤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우리 학교에 그 베스트 세터 상 받았던 녀석도 있을 걸?”
수다스러운 것을 좋아하지도 않건만, 왜 자꾸 제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는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으나 아무튼 그에게선 아까의 친구에게보다 꽤 괜찮은 정보를 받았다. ‘베스트 세터 상.’ 그것은 저와 같은 나이 대에, 배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웬만해서는 알고 있을 만한 상이었다. 어떤 상이든 값진 것이겠지만, 베스트 세터 상의 경우는 조금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승에서 매번 떨어졌음에도 베스트 세터 상을 받은 것은 전국에 진출한 학교의 부원이 아닌, 그 떨어진 학교의 부원이었다. 저 역시 그 시합을 흥미롭게 보기도 했다. 이름도 깨나 날렸던 것으로 기억하나, 아쉽게도 자신은 그의 이름까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다녔던 중학교의 배구부는 그리 실력 있던 곳이 아니었기에 시합에서 금방 떨어졌고,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여러 시합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제 눈에 들어왔던 사람이 바로 아까 말했던 베스트 세터 상을 받은 녀석이었다. 아마 자신뿐만 아니라 그 곳에서 시합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다들 그랬을 것이다. 자신의 파트너는 물론, 팀메이트 개개인이 자신 있어 하는 코스로 망설임 없이 토스 해주던 모습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 쟤랑은 배구하고 싶을지도. 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거기에 과장을 조금 보태 본다면 남자인 자신도 반할 법한 플레이를 했다. 아쉽게도 녀석이 있던 학교는 절대강호(絶對强豪)였던 시라토리자와 중학교를 꺾지 못했으나, 결국 그 녀석은 베스트 세터 상을 받고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이 세이죠로 왔다니.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그 중학교가 키타이치였던 것 같은데 그래서 온 건가?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생각난 중학교 시절 마지막 배구 시합을 떠올리고 있다 보니, 벌써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제 옆에 있던 친구들도 제 자리로 돌아갔고, 그새 흥미를 잃어버린 자신도 그 생각을 잠시 내버려둔 채, 수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아오바죠사이 배구부에 입부한 것을 환영한다.”
부 활동에 처음으로 참가하게 된 날. 확실히 중학교 때 배구부와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고등학교라는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제가 다녔던 중학교보다, 훨씬 유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큰 체육관과 많은 수의 코트와 부원, 정식 감독님과 매니저까지. 게다가 앞에서 인사를 하고 있는 주장 역시 저보다 두 살밖에 많지 않았음에도, 그 느낌이 남달랐다. 꽤 이름을 날리고 있는 배구부답게 선배 부원들도 자신들에게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았고.
중학교 때와는 다른 기분에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다가 느낀 것은, 반에서와 같은 위화감이었다. 며칠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키타이치를 졸업한 녀석들은 이 학교 어디를 가더라도 그 분위기가 익숙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저들끼리 무리를 짓고, 키타이치가 아닌 녀석들은 또 저들끼리 뭉치고. 그런 게 있지 않은가, 무언가의 소속감 같은 것. 특히 체육계다 보니 그런 느낌이 더 한 듯싶었고 선배들도 있겠다, 그들에게 있어서 배구부는 중학교의 연장선 같은 기분인 모양이었다. 제 앞에 있는 선배들도 오랜만에 만난 후배들에 들떠서인지 딱히 그 분위기를 숨기지도 않았고―아마 숨길 필요성도 못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키타이치를 졸업한 녀석들에게선 긴장한 기색이라곤 찾기 힘들었다. 아닌 놈들만 어색한 거지, 뭐.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인지라, 저와는 관계가 없다 생각하며, 남 생각하듯 배구부를 바라보고 있을 때, 제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1학년 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아 1학년이 분명하겠지만 연갈색 머리의, 웬만한 선배들보다도 커 보이는데, 운동계 남학생답지 않게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 어디에서 봤더라? 남들에게 큰 흥미를 갖고 있지 않는 제 머릿속에 남아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배구만을 하고 싶어 맨 뒤에 서 있던 저와는 달리, 맨 앞에 서서 선배들을 향해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퍽 익숙한 것으로 보아 저 녀석도 키타이치를 졸업한 학생인 듯싶었다. 키타이치를 졸업했다면 뭐, 경기에서 봤나 보네. 아- 어차피 첫날이라고 배구도 안 할 것 같은데 그냥 빨리 끝내 줬으면 좋겠다. 금세 또 흥미를 잃어, 이 시간이 언제 끝날지에 대해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키타이치 중학교 출신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 생각났다. 그 베스트 세터 상.
한 명씩 자유롭게 자기소개를 하고 있을 때 들린 이름으로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방금 전까지 쳐다보고 있었던 그가 바로 친구들이 말했던 그 베스트 세터 상의 주인공이었다. 진짜 우리 학교였구나.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지만 역시 제 눈으로 보는 것하고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게다가 사실대로 말하자면 친구들과 이야기 했을 때에는 흥미 없는 척 했지만, 그를 좋아했었다. 정확히는 ‘그의 배구’를 좋아했으며, 여기서 좋아한다는 뜻은 ‘동경’의 의미에 가까웠다.
그저 중학교 마지막 시합 날, 관중석에서 그를 쳐다본 것이 다였음에도 오이카와의 배구는 자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누가 어느 정도였냐고 물어 본다면 중학교 때의 시합을 끝으로 배구를 그만 두자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그의 배구를 보고는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고 마음먹기까지 했을 정도, 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 그가 제 눈앞에 있다니, 역시 사람 일이다.
“키타이치 출신 윙 스파이커 이와이즈미 하지메입니다.”
오이카와의 것이 끝나자 뒤이어 들린 인사였다. 부가적인 설명 없이 간단하게, 전 것과는 비교될 정도로 담백하고 차분한 느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이카와보다 키는 작아 보였지만 어딘가 더 듬직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생각났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파트너였던 윙 스파이커. 세터인 오이카와가 그의 눈앞으로 토스해주면 그것을 받아 정확한 코스로 날리던 녀석. 공격이 성공하면 시원스런 웃음을 보여주고, 공격이 실패하면 우울해 하는 후배들을 다독여 주던 에이스.
전국에 올라가지는 못했어도 그 시라토리자와에게서 한 세트나 얻어낸 키타이치를 이끌던 두 사람이었다. 그들을 정확히는 알지 못했어도, 그들을 수식하는 단어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번에도 생각했었던 거지만 그런 두 사람이 시라토리자와가 아닌 이곳에 있다니, 중학교 때는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루기 위해서 온 건가? 어지간히도 시라토리자와를 이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줄만 알았던 생각이 자꾸만 그들에게 향하는 것을, 제 차례의 인사로 겨우 그만둘 수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기다리던 해산 시간이 다가왔다. 차라리 그 시간만큼 배구라도 했으면 지겹지도 않았을 텐데. 빨리 보내 주면 좋겠건만 잠시 조정해야 할 것이 있다며 주장과 부주장이 사라지자마자 주위는 시끄러워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저 녀석도 어딜 가나 시끄러울 놈이겠구나. 조용히 활동하고 싶은 제 부 활동을 지키고 싶다면 저 녀석만큼은 피해야 하는 1순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옆에서 시끄럽지도 않은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와이즈미는 2순위. 이 역시 이유는 간단했다. 저 두 사람은 한 세트임이 분명했으니까.
“마츠카와랬지? 너도 윙 스파이커 했었다며. 잘 부탁한다.”
속으로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며 다가오는 부원들과 대충의 인사를 하고 있을 때―인상이 좋은 편은 아닌지라 주변에 다가오는 부원들은 사실상 몇 없었다.― 마츠카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이와이즈미였다. 인사를 해오더라도 두 사람 중에서는 단연코 오이카와 쪽이 먼저일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조금 당황한 것은 사실이다.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냐. 이와이즈미가 내민 손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뱉은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곤 손을 마주잡았다. 굳은살이 박여 있는 손은 이와이즈미가 배구 연습을 얼마나 해 왔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예였다. 정말 배구를 좋아하는 구나.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상하지, 분명 배구에는 흥미가 없어진 줄 알았는데.
“이와쨩 너무해! 같이 인사하러 가자했잖아!”
“네가 선배들이랑 하는 인사가 길어진 게 문제거든? 그리고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이 쿠소카와!”
인사를 끝마치고 온 건지 어느새 이와이즈미 옆으로 찾아온 오이카와였다. 굳이 함께 인사할 필요가 있나? 아니, 그것보다 이와쨩이라니. 남자 고등학생한테는 안 어울리는 별명 아니냐. 거기에 쿠소카와는 또 뭐야.
처음 듣는 이상한 별명에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느라 힘들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와이즈미에게는 이미 저가 웃었다는 사실이 들킨 것 같기는 했으나 모른 체하며 앞에 내밀어진 오이카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와이즈미의 것과는 다르게 하얗고 긴 손가락이었지만, 이와이즈미의 것과 마찬가지로 손에는 굳은살로 가득했다.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이 두 사람과 함께라면, 매사에 흥미가 없었던 자신이라도 배구에 흥미를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응. 나도 잘 부탁해.”
그것이 앞으로 3년 동안 저를, 그리고 세이죠 배구부를 이끌어 준 자신들의 에이스와 주장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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