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오이] 익숙함

2020. 4. 26. 16:51

* 리퀘박스 XD

 

 

 

‘미조구치 군~.’

 

청춘들이 한 세대를 보내는 고교 3년. 오래라면 오랫동안 지겹도록 들어왔던 호칭이다. 제대로 안 부르냐! 학생이라면 쓰지 않을 호칭으로 오이카와는 저를 불렀고, 그런 그에게 소리를 지르면 그는 크게 웃으며 도망가곤 했다.

 

체육계에 종사하고 있다 해도 위계질서를 크게 따지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저를 골리기 위해 말간 얼굴로 부르는 그 호칭을 들을 때마다, 괜히 선을 넘을 것만 같아 크게 한 소리 하곤 했다.

 

물론 그것이 단순히 저를 골리기 위함뿐이었다면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운동부 학생들 사이에서 얕잡아 보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온갖 갈등을 맺고 지낸 오이카와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을 테니, 그에게 맞춰줬을 뿐이다. 물론 학생들이 얕잡아 본다고 그냥 당하고만 있을 자신도 아니지만.

 

게다가 정말로 심각하게 여겨 주의를 시킬 생각이었다면, 주장인 오이카와의 자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혼자 따로 불러내어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저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저와 오이카와만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라는 것을. 처음에는 장난으로만 불렀던 호칭은 어느새 구조의 신호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저를 부르면 부러 과장하며 한 소리 해 오이카와를 위로하는 것으로.

 

제가 키우는 팀의 중요한 팀원으로서, 조용히 그의 성장을 지켜보며 숨겨온 마음의 주인으로서. 그 상황으로 인해 오이카와의 분위기가 완화된다면, 누군가 얕잡아 볼 기회를 주는 일쯤은 감수할 수 있었고, 오이카와도 제가 자신을 위해 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은 웃긴 상황이 늘 반복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이어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제가 그 호칭을 마냥 싫어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영악한 아이는 알았기 때문도 있었다. 눈치 하나는 빠른 놈이니까.

 

 

 

아무튼, 이제는 다 같이 모여 앉아 안줏거리로 삼을 만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꺼낸 이유는,

 

“토오루.”

 

평소에는 수비가 철저한 블로커처럼 얼굴에 철벽을 깐 놈이 제가 이름만 부르면 얼굴이 빨개진다는 것이다. 너도 부끄럼을 타냐? 처음 그 얼굴을 마주했을 때, 진심으로 물어보기도 했다. 한참 때부터 봐온 사이로서 드물게 보인 반응은 꽤 신선했기에, 가끔은 부러 불러보기도 했다.

 

이름을 듣는 것도 낯설어하는데, 부르는 건 당연히 바랄 수도 없었다. 즉, 오이카와가 부르는 제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다는 뜻이다. 능숙할 거로 생각했던 오이카와와의 연애는 어리숙했고 색다르기 그지없었지만, 이런 반응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싫다는 것도 아니고, 오이카와가 힘들어하는 것을 굳이 바꿀 생각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토오루를 불렀을 때 나오는 반응이 신선해서. 옛날 제 반응을 즐기던 오이카와와 마찬가지로, 그의 반응을 즐겼다. 하지만 토오루라 부르는 날이 많아질수록,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을 듣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으로 제 이름을 듣고 싶은 건 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리라.

 

역시 이럴 때 발전시키는 맛이 있다고 생각하며 열의에 불타오르기도 했다.-누구는 직업병이라고 하지만 애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며 반박하곤 한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미조구치 군은 몰라도 돼!”

 

물론, 오이카와를 이기기엔 아직 멀었지만.

 

 

*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오이카와는 베개 위에 팔로 머리를 괴고는 먼저 잠자리에 든 미조구치를 빤히 쳐다봤다. 불도 켜지 않아 깜깜한 방 안에서는 실루엣 정도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에도 익숙해지면 금세 이목구비를 찾을 수 있다.

 

근래 생각이 많아진 탓에, 미조구치가 잠을 자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편한 건 아니라서, 생각을 잠재우기 위해 시작한 염탐의 시간도 벌써 한 달이다.

 

고교 시절 처음 마주했던, 무섭지마는-처음에는 그랬다.- 저들을 위해준 코치가 어느덧 침대 위 제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조구치 군과 함께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멋모르는 어린 시절에야 성질을 살살 긁어내며 옆에 있었지만, 그거야 교사와 제자 사이에서나 성립할 수 있는 관계였다.

 

더군다나 졸업하고는 미조구치 군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으니까. 무엇도 바라지 않은 주제에 눈 떠보니 함께 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의 줄타기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미조구치 군.”

 

찌푸린 채 잠자고 있는 미조구치의 미간을 톡 건드렸지만, 살짝 뒤척일 뿐 쉬이 깨지는 않는다. 오이카와는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뉘었다. 그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장난이라고 말하고, 또 부담을 느끼는 저를 위해 배려하고는 있지만, 내면에 은근히 바라고 있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고수했던 버릇을 버리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과거의 것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름이 주는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미조구치가 부르는 제 이름의 영향력만 생각해봐도 그랬다. 그러니까 불러주길 바라는 거겠지.

 

알면서도 못하는 이유는 그 옛날부터 이어온 익숙함 때문이다.

 

“누구는 심란한데, 엄청 태평하네.”

 

고작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 일에 생각이 많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저에게는 단순한 호칭 변화가 아니다. 그의 반응을 즐기기 위해서 불렀던 호칭은 어느덧 저를 봐달라는 신호로, 장난스럽기만 했던 기분은 점차 간질거림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입에 붙은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건, 낯간지럽다기보다 굉장히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미조구치 군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걸 알면서도, 미조구치 군은 미조구치 군이니까.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닌데.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만으로도 예전과 달라지는 것 같아서. 달라지기는 훨씬 달라졌지만, 그래도 천천히.

 

“... 사, 사다유키 군.”

 

목소리를 가다듬고 겨우 뱉어낸 말은 남몰래 연습하고 있었지마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실 별거 아닌 걸 알면서. 알면서도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와 동등한 입장으로 생활을 하는 것에도 익숙해지기까지도 오래 걸렸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지금도 그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어색할 때가 많다. 만일 철없던 18살의 오이카와였다면 쉽게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때야 지금과는 다른 마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단순히 미조구치 코치의 제자 오이카와가 아니다. 그러기에 더 조심스러웠고, 조금이라도 빨리 불러보고 싶었다. 그래야 저를 놀리는 미조구치를 놀릴 수 있지.

 

“사다유키 군.”

 

그래도 처음보다는 조금 수월하게 나온다. 어둠에 익숙해져 조금씩 마주하게 되는 이목구비처럼, 이에도 익숙해질까. 미조구치를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오이카와는 한없이 읊조리다 눈을 감았다.

 

“사다유키 군, 사랑해.”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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